첫 선교사 파송, 그 후 100년
한국의 영성 169개국에 활짝
세계 교회사는 선교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오순절 성령 충만 이후 복음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로 퍼졌고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선교하는 삶이 강조됐다. 그 결과 로마제국은 기독교 국가로 변했고 유럽의 기독교는 1000년간 이어졌다. 근대 이후 세계 기독교는 세계적 선교운동으로 확장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19세기 말 영미 부흥운동은 학생자원운동을 일으켜 20세기 선교운동의 원동력이 됐고 개인과 국가를 변혁시켰다.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한국교회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다. 1885년 한국 땅을 밟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학생자원운동의 열매였다. 1903년 원산대부흥과 1907년 평양대부흥은 해외 선교를 앞당겼다. 1907년 장로교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이듬해 복음의 불모지 제주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제주 선교는 박해의 연속이었다. 제주 특유의 미신과 우상으로 이 목사의 전도활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 목사 자신이 과거 미국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던 ‘불량배’였음을 상기하고 묵묵히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이상규 고신대(교회사) 교수는 “이기풍 목사는 굴욕을 당하고 매를 맞기도 했고, 집단적인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전도자의 길을 갔다”며 “그 결과 1908년 제주도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한때 성내교회라고도 불린 성안교회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제주 선교는 미신과 우상의 땅을 복음으로 변혁시키는 계기가 됐고 이후 본격적인 해외 선교를 위한 터를 닦았다. 한국교회는 유학생 등 흩어진 한인에 대한 동포애적 돌봄의 일환으로 선교사들을 줄줄이 파송했다. 같은 해 일본 도쿄로 유학생 선교를 위해 한석진 목사를 파송했고 1909년 러시아와 만주 일대 한인 동포 24만명을 위해 최관흘 목사를 파송했다. 이들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와 함께 일제 강점기 시절 조국 독립을 위해 신앙으로 하나가 됐다.
1913년 11월 한국교회는 최초로 해외 선교사를 중국 산둥성에 파송했다.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등이 선교 여정을 시작했다. ‘산둥성 선교’는 5대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가 57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강제 출국당할 때까지 집중했다. 한국교회는 미국 선교부, 중국교회와 협력하면서 44년간 의료와 교육 사업 등에 전념하면서 공자와 맹자의 땅을 변화시켰다.
미국의 윌리엄 커(공위량)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에 대해 “그들은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선교지로 나아갔다”며 “삶을 드리고 단순한 복음 메시지를 주었다”고 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개의 현지 사립학교가 생겨 436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기독교교육을 시켰고 40년대 중반까지 35개 교회와 세례교인 1716명의 교세를 가질 정도로 산둥성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해방 후 선교사 파송, 그리고 도약=해외 선교의 성공적 경험은 해방 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1952·1956년), 밥 피어스 목사의 부흥운동(1955년)에 이어 복음화전도운동(1965년), 70년대 부흥운동과 만나면서 선교의 대도약을 맞이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 등을 태국에 파송하면서 해외 선교에 불을 붙였다. 이후 60년대부터 폭발적 선교의 성장을 보여 64년부터 78년까지 매년 평균 3.3명의 선교사가 해외로 파송됐고 89년까지 10년간은 연평균 46.6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 결과 지난해까지 169개국에 2만4742명을 파송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도약과 함께 한국교회 영성의 ‘세계화’도 진행됐다. 새벽기도와 제자훈련 모델은 현지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자라는 데 영적 파워를 공급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과 구역조직 역시 ‘홈 셀 그룹’ 등으로 번역되면서 현지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91년 방글라데시 찔마리마을에 처음으로 전해지면서 필리핀, 미얀마 등지 빈민들에게 희망의 싹을 심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한정국 사무총장은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국 역사에 섬김과 봉사의 정신을 심었다”며 “한국교회는 이 같은 정신으로 타문화권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