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⑨ 3·1운동의 주역, 교회2013.08.28 19:02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민족대표 33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겼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나와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갔다.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힘주어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청년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경신학교를 나와 해주 본정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정재용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전날 황해도 해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재용은 2년여간 옥고를 치렀으나 감옥을 나온 뒤에도 의용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한국교회
정재용뿐 아니라 3·1운동의 불씨를 붙인 크리스천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신석구 이승훈 길선주를 비롯해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교회 곳곳에서 크리스천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3월 1일 평북 의주에 있는 의주서부교회당 공터에선 수백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했지만 지역의 만세운동을 위해 남아있던 유여대 목사가 김창건 목사, 김이순 전도사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예배당 근처로 불러 모은 것이다.
평양의 숭덕학교 운동장에서도 김선두 목사의 목소리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평양 지역 교회 6곳의 주도로 모인 1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던 그는 “구속돼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고 연설했고 이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날은 주일이었다. 목회자가 일본경찰에 붙잡힌 가운데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주일예배가 드려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특히 정동제일교회에선 구속된 오화영 목사를 대신해 이병주 전도사가 예배당 밖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의 뜨거움을 전했다.
3월 8일 대구의 한 장터에선 700여명이 만세운동을 했다. 이날 경북노회장이던 정재순 목사와 노회 서기 이만집 목사 등은 교인들과 계성학교 학생들을 불러 시장 상인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다. 정 목사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시기인데 각자가 그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남 공주에선 4월 1일 공주읍교회 현석칠 목사가 영명학교 교사 및 학생들과 함께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일제의 잔혹한 교회탄압
일제는 3·1운동을 주도한 한국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크리스천들은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맞거나 체포되기도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헌병 때문에 예배가 중단되는 일도 벌어졌다.
교회탄압의 대표적 사건은 ‘제암리 학살’이다. 1919년 4월 15일 일제 검거반은 제암리교회에 주민들이 모이게 한 뒤 예배당에 불을 질러 37명이 목숨을 잃게 했다. 같은 달 초 경기도 수원군(현재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의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제암리교회 성도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광주 북문안교회는 교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1919년 4월 1일 폐쇄됐다.
한국교회의 피해상황은 1919년 장로회 총회에 보고됐다. 이에 따르면 3804명이 체포됐고 이 가운데 2162명은 매를 맞고 풀려났다. 41명은 사살됐고 6명은 매를 맞아 사망했다. 파괴된 교회당은 12곳이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다른 교단까지 합치면 피해는 막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직후 전국의 장로교 및 감리교의 교회와 교인은 각각 1705곳(14만4062명), 472곳(3만5482명)이었다. 일제 탄압으로 두 교단의 교회와 교인 수는 이전보다 각각 88곳, 2만2409명이 줄었다.
일제는 1938년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하라고 강요하는 등 탄압 수위를 높였으나 이에 격렬하게 저항한 순교자들이 적지 않았다. 경남 창원시 상남동 문창교회에서 1931∼1936년 시무했던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로부터 설교 금지령을 받고 수차례 투옥됐다 1944년 감옥에서 순교했다.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유는 애굽에서 박해받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절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