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정홍기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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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우체국-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실패는 선교의 어머니’2013.08.18 17:15

단기 선교팀의 모함으로 교회 분열되고 신학교 문닫아 결국 오해 풀리고 비전 찾아

예수님은 가까운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다. “죽는 순간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호언장담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유다는 돈에 눈이 멀어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전형으로 지금까지 묘사되고 있다. 인간의 완악하고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다.

20년 동안 몸담고 있는 루마니아 선교 현장에서 보낸 시간도 ‘배신의 세월’, 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선교 대상으로 삼고 있는 루마니아인뿐만이 아니다. 동족인 한국인들과 또 다른 외국인들의 배신,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 실망감, 그로 인한 사역의 실패로 주저앉을 뻔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나의 실패담은 선교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20년 전인 1993년 9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막 도착한 우리 부부는 집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전도와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30대 초반의 청년 빅토가 성경공부에 합류했다. 영어가 유창한 젊은이였는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미혼인 그가 이혼한 여성과 동거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니던 교회에서 치리를 받은 뒤 우리 가정의 성경공부에 동참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청년이 성경공부반에 들어오자마자 신학생 출신의 다른 참석자가 반기를 든 것이다.

“빅토 같은 죄인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이분법적 사상이 팽배했다. 교회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전통적인 교리적 가르침을 과도하게 중시하면서 음주나 흡연, 커피 마시는 것조차 죄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분”이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해가며 빅토가 신앙생활을 함께할 수 있도록 그 신학생을 위해 기도하고 설득하고 권면했다. 그 결과 빅토에 이어 동거녀까지 주님을 믿게 됐다.

이어 빅토 커플은 우리 부부를 증인으로 세워 결혼까지 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터라 우리는 지인을 수소문해 빅토 부부가 옷가지와 신발을 파는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빅토 가정은 3만 달러가 넘는 큰 수익을 남겼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떠나버린 것이다. 인간적으로 참 서운하고 야속했다.

이곳에서는 물품이나 집안의 가재도구들을 도둑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 일도 호되게 당하게 될 때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 실망감으로 억장이 무너진다.

1997년 새로운 예배처소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장로교신학교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타 교단 청년 20여명을 초청, 공동생활을 하며 사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이해하기 힘든 돌출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전면허증도 없으면서 교회 자동차를 밤새 몰고 다니는가 하면 화장실 비누나 부엌칼, 그릇, 심지어 화이트보드 색연필까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훔쳐가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나 자신을 책망했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는 성경 말씀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관계, 나아가 애써 꾸려왔던 신학교가 폐쇄되고 교회까지 분열되는 일을 겪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장로교 신학교를 꾸려가던 당시에는 우리를 돕기 위해 북미 쪽에서 단기 선교팀원들이 건너와 함께 사역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술과 담배를 즐기는 등 루마니아 교회 문화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우리의 권면은 ‘독화살’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현지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 부부가 재정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닌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말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오해를 더 키웠다. 그리고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신학생 중에서도 우리와 가족처럼 지냈던 가브리엘과 크리스티나는 “정직하지 못한 한국 선교사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라”는 북미 선교팀원들의 말에 넘어가 우리 곁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학생들도 신학교에 발길을 끊었다. 공들여 세웠던 신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무엇보다 10년밖에 되지 않았던 루마니아 유일의 장로교회마저 분열되는 지경에 처했다.

참으로 허탈했다. 북미 선교사들과 우리를 믿지 못하는 가브리엘, 크리스티나. 그들 모두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은 우리를 한동안 방황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아팠던 것은 이제 막 진리를 찾아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교회 새 신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아픔은 니꾸 목사와의 이별이었다. 그는 우리가 루마니아에 도착해 전도한 초창기 결신자였다. 당시 현지 철도국에서 일하던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97년 신학교 신학생으로 입학해 우리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와줬다. 하지만 신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그는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새로운 일터를 찾아 떠났다. 그는 아직도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결백을 증명하고 반박할 방안을 찾으려고 방법을 모색했다가 관뒀다.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것을 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2년쯤 지났을까. 문제의 북미 선교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귀를 의심했다. “문화적인 차이와 미숙한 경험으로 교회가 분리되고 사역에 어려움을 끼친 데 대해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해 온 것이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함께 사역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러고 나서 얼마쯤 지난 뒤에는 우리 곁을 떠났던 루마니아 신학생들(이미 목회자가 되어 있었다)이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며 사과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10여년을 동고동락했다가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이 오해를 풀고 다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는 사라져가던 비전을 다시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제 선교사를 파송하는 성숙한 교회로 자리잡도록 인도해주셨다. 우리의 사역은 현재 대학과 국회, 경제 분야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랑하사 가르치시고 섬기시는 본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다. 하지만 주님은 배신에 대해 앙갚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죽음으로 순종하셨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이곳에서 당한 배신과 수모를 어찌 예수님의 고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속 좁은 생각으로는 사역이 실패하면 그냥 포기해도 그만일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배신과 실패의 경험을 한층 더 성숙한 사역자로 이끄는 스승이 되게 하셨다. 그 속에서 주님의 풍성한 위로하심과 인도하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 실패는 선교의 어머니라고.
●정홍기 선교사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1985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졸업
-AFC선교회 총무(1986∼1991)
-1992년 AFC선교회 루마니아 선교사로 파송
-루마니아 시온장로교회 목사(1992년∼현재)
-루마니아 전문인 지도자 개발원 대표(2010∼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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