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태풍 할퀸지 닷새… ‘생지옥’ 타클로반을 가다
[동아일보]하늘에서 내려다본 레이테 섬 타클로반 시는 ‘하이옌(海燕·바다제비)’ 태풍 해일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너비 1km의 바닷가 육지는 마치 융단폭격을 당한 듯 말 그대로 거대한 건축물 쓰레기장이었다.
12일 오전 필리핀 세부를 떠나 약 1시간 뒤에 도착한 타클로반은 빗줄기가 갈수록 거세졌다. 이런 빗줄기 속에서도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공항 밖에 장사진을 친 인파였다. 하이옌이 필리핀을 휩쓴 지 5일째인 이날 오전 필리핀 공군 소속 C-130 수송기 두 대가 이재민들을 태우고 가기 위해 도착했을 때 3000명이 넘는 인파가 공항 울타리를 넘어 수송기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공항에서 비행기가 날아오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공항을 경계하던 수십 명의 군과 경찰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수송기 앞에서 접근을 저지당한 군중은 울부짖었다. 한 여인은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며 무릎 꿇고 사정했음에도 탑승을 거부당하자 “공항에서 죽으라는 말이냐”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어떤 엄마들은 아이들이라도 태우고 가 달라고 머리 위로 자식들을 높이 쳐들었다. 이날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부상자건 노약자건 대부분은 또다시 폐허와 죽음의 땅에 남겨졌다.
비행장을 벗어나 과거 시내였던 곳으로 향하는 길은 참혹한 재난 현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물에 분 시신들이 그대로 길 옆에 방치돼 있었고 일부는 담요와 옷가지로 덮여 있었다.
피난처가 없는 이재민들은 판자 몇 개와 비닐을 덮고 굶주림과 싸우고 있었다. 이재민을 돕기 위해 국제사회가 내민 구호의 손길은 아직 타클로반에 미치지 못했다.
태풍으로 연락이 두절됐던 한국인은 11일 10명에서 12일 오후 11시 현재 7명으로 줄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측은 “연락이 두절됐던 한국인 10명 중 3명이 타클로반 공항에 나와 생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 필사의 탈출 행렬…행운은 극소수
굶주림이 심해질수록 타클로반의 치안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공항에서 만난 한 60대 여성은 굶주림도 문제지만 치안이 불안해서 남편과 아들을 남겨두고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 공항에 나왔다고 말했다. 이번 태풍으로 600여 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던 타클로반의 한 감옥이 붕괴되면서 죄수들도 탈출했다. 경비원들이 총을 쏘며 저지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 “구호품-식량 전쟁… 수송기 못타면 죽는다” ▼
통곡의 필리핀
전기가 끊긴 타클로반에 어둠이 밀려오자 집을 지키고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은 약탈 공포를 호소하며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몸이 아픈데 비상 구급약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탈출 행렬에 들어갔다.
필리핀 당국은 11일 저녁부터 타클로반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약탈자들에 대한 총기 발사를 허락했다. 구호품을 싣고 도시로
향하는 차량 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장 군인들이 함께 탑승했다. 전날 적십자사 차량의 구호물품은 굶주린 생존자들에게
약탈되기도 했다. 약 400명의 특수부대와 군 병력도 시내 곳곳에 배치돼 순찰하는 것이 목격됐다.
필리핀 당국은 12일부터 타클로반에 필리핀에어 소속 특별기 6대를 투입해 탈출하는 사람들을 태워 나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일주일 치 예약이 모두 끝난 상태다.
○ 키보다 높은 쓰레기 더미 속에 시신들 여기저기
공항에서 타클로반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 곳곳에는 아직도 무릎까지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많았다. 타클로반에는 또 다른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중심부 풍속이 시속 55km인 소형 태풍 ‘소라이다(Zoraida)’는 12일 오후 피해 지역에서 100여
km까지 접근해 비를 뿌리고 있다. 이 때문에 재난 수습 작업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시내로 이어진 간선도로는 그나마 도로를 덮었던 쓰레기들이 치워져 트럭이 오갈 수 있었다. 길 옆으로 초췌한 모습의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나무에 걸린 돼지와 개 등 가축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폭풍해일에 밀려온 가축들이다.
군데군데서 작업 중인 중장비도 목격됐다. 하지만 구조 인력이 투숙하고 있는 숙소는 전기와 물이 끊겨 많은 인력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공항에서 타클로반 시로 가는 대로 주변은 쓰레기가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위에선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알프레드 로무알데즈 타클로반 시장은 “많은 시신들이 쓰레기와 함께 섞여 있다”고 말했다. 시신
수습이 급선무로 보였다.
태풍에서 살아남은 은퇴한 여교사 버지니아 바시닝 씨(54)는 해일이 닥쳤을 때 집 2층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8일 저녁 순식간에 2층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집 주변에선 떠내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고 태풍이 지나갈 당시를 떠올렸다. 약 30분 뒤 바닷물이 빠졌을 때 그는 집 벽에 14구의 시신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시신들은 12일까지 그대로 방치돼 부패되고 있다고 전했다.
시내는 물론이고 공항에서 불과 수백 m밖에 떨어지지 않은 교회당 건물에도 여전히 많은 시신이 방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존자들이 가족을 애타게 찾는 장면도 보였다. 필리핀 TV5 소속 기자들은 “타지에 있는 가족에게 생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해
현장을 뚫고 수 km를 걸어온 한 의사를 봤다”며 “필리핀 사람들이 이토록 엄청난 슬픔과 절망을 경험한 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닐라 소재 GMA방송국은 친지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급증하자 자사 웹사이트에 ‘가족찾기 블로그’를 새로
개설했다.
○ 필리핀 정부, “공식 사망자 1774명” 실제 사망자 최종 확인 불가능할 듯
타클로반 시 입구에 도착했을 때 ‘Help, SOS’라고 적혀 있는 대형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상 초유의 재난을 입은 필리핀 피해자들이 세계를 향해 보내는 구조의 메시지였다.
국제사회의 구호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생존자들도 있고, 태반이 오염된 물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도시에선 국제사회의 구호품이 도착해 배분된다는 소식이 퍼지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장사진을 쳤다. 그러나 아직 식량과
물, 의약품은 이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필리핀 당국은 12일 오전 이번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는 1774명, 부상자는 2847명으로 집계됐으며 66만 명이 집을 떠나 피난을 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시신이 바다에
떠밀려 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정확한 숫자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전히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이번 태풍으로 필리핀이 국내총생산(GDP)의 5%가 넘는 최대 140억 달러(약 15조 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