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구호 경쟁 뒤엔… 美·中·日 파워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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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구호 경쟁 뒤엔… 美·中·日 파워게임

70년전 침략자 日本, 필리핀 구호천사로 재상륙

美, 지원 병력 무려 9000명… 20여년 만에 군대 재주둔 추진

中, 美·日 파병에 부담감… 소극적 지원 벗어나 의료船 파견

日, 2차대전 후 처음 자위대 지원… 침략군 이미지 희석 노려

흔들리는 필리핀 民心 – “할머니는 일본인 증오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생각 안들어”

美, 압도적 물량 공세 – 핵 항모까지 동원해 구호활동… 미군기지 반대여론 달래기

中, 뒤늦게 ‘아뿔싸’ – 필리핀과 영토 분쟁 벌이는 중 美·日에 자극받아 지원 늘려

초강력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필리핀의 피해 복구 현장에서 미국·중국·일본의 ‘구호 지원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재난에 빠진 주민들을 돕는다는 인도적 차원의 ‘명분’뿐 아니라 아시아 패권 경쟁의 요충지인 필리핀에서 ‘민심 잡기’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각국의 ‘실리’가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자위대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필리핀 땅을 밟았으며, 미국의 항공모함에 이어 중국의 해군 의료선도 속속 도착하고 있다.

21일 현재 필리핀 당국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번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는 4011명, 실종 1602명이며 물적 피해가 2억3600만달러(약 2500억원)에 달한다. 피해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의 움직임이다. 하이옌의 최대 피해 지역인 필리핀 중부 레이테섬 타클로반공항에는 20일 일장기가 그려진 일본 항공자위대 C130 수송기 2대가 착륙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 전했다.

레이테섬 앞바다는 2차대전 최대의 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1944년 10월 미국·호주 연합군과 맞붙은 일본군은 항공모함·전함·구축함 20척이 침몰하고 1만명이 전사했었다. 이런 역사가 있는 레이테섬에 일장기를 내건 자위대가 70년 만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자위대원들은 수송기에서 각종 구호 물품을 내려놓고, 섬 탈출을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주민들을 태워 나르고 있다. 레이테섬 해변가에는 일장기가 나부끼는 의료 텐트도 설치됐다. 지난 15일 선발대로 파견된 긴급 의료팀은 매일 150여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최근 적극적인 군사력 확충에 나서고 있는 일본은 이번 자위대의 구호 활동을 통해 ‘일본군’에 대한 악몽 같은 기억을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의 우려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고, 이미 상당 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다.

타클로반의 한 주민은 “우리 지역에 구호팀이 온 것은 자위대 의료팀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른 주민 고라손 비노야(56)씨는 WSJ 인터뷰에서 “어릴 때 할머니가 과거 전쟁 때 일본인들이 매우 무서웠다고 했지만 지금 일본 군대(자위대)의 구호 활동에 대해선 부정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아시아 중시’ 전략 속에 필리핀에 다시 군대를 주둔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압도적인 지원 규모와 속도로 필리핀인들의 마음을 사고 있다. 해병대 병력과 민간 구호팀은 물론 핵 항모까지 동원해 구호물자를 실어나르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 현재 미군은 9000여명을 재해 활동에 투입했다. 지난 10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제2해병원정여단 선발대가 가장 먼저 재난 현장에 도착했으며 연일 병력과 장비 지원을 늘리고 있다. 승조원 6000여명과 항공기 80대를 실은 조지 워싱턴 항모전단도 동원됐다.

미군의 필리핀 귀환도 20여년 만이다. 미군은 식민지 시절을 포함해 거의 100년간 필리핀에 주둔했지만 필리핀은 미군 기지 오염 문제로 반미 감정이 팽배했던 1991년 미군 주둔 연장법안을 부결해 수비크만 해군 기지, 클라크 공군 기지에 있던 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현재 아시아 패권 강화를 위해 순환 배치 형식으로 필리핀에 다시 미군을 주둔시키려 하고 있지만 필리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하이옌 피해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의 노력은 미군의 부정적 이미지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고 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필리핀 미디어에 비친 미군의 모습은 더 이상 주권을 짓밟는 세력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라며 “인터넷에도 ‘고마워요, 미국’을 외치는 소리가 넘쳐난다”고 했다.

남중국해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을 놓고 필리핀과 영토 분쟁 중인 중국은 뒤늦게 ‘구호 외교’에 뛰어들었다. 애초 필리핀에 10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국제사회로부터 질타를 받은 중국은 51명으로 구성된 정부 차원의 응급의료팀과 홍십자회의 국제 구호대 30명을 파견키로 했다. 홍십자회 1진 구호대는 20일 출발했다. 또 높은 재해 의료 구호 능력과 기동성을 지닌 해군 소속 의료선 ‘화평방주’를 21일 필리핀 재해 지역으로 보냈다.

훙레이(洪磊)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쑹칭링기금회가 최근 필리핀 재해 지역에 320만위안 상당의 임시 주택 200동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WSJ는 “전략 요충지인 필리핀에 미국과 일본의 군대가 속속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중국이 상당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각국이 다투어 재난 피해를 입은 나라를 도우려는 이유 중 하나는 해당국에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최고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2004년 인도네시아가 쓰나미로 큰 피해를 봤을 때도 항모를 급파하는 등 적극 도왔고, 이로써 당시 최악으로 치닫던 양국 관계는 극적으로 회복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미국은 2만4000명을 투입한 ‘친구작전’을 50일간 벌였고, 일본은 이후 미군 기지 이전에 대한 입장을 전향적으로 수정했다.

일본은 2010년 아이티 지진 때 2년간 자위대 1900명을 파견했고, 온두라스·터키·이란·인도 등지에서 재난 구호를 통해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확대해왔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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