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한국문화의 선교적 가치와 기여
김우철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현지신학을 공부하면서 한국인의 정(情)이 선교적인 자산임을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에즈베리 신학교에서의 학위논문은 한국인의 정이 어떻게 선교에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 특강은 오늘의 연구결과가 아니라 학위논문의 요약임을 먼저 밝혀둔다. 논문은 5장으로 구성했다. 1장은 논문계획서요, 2-5장까지는 연구조사다. 연구조사는 그 첫 단계로 정의 뿌리를 한국인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탐구했다. 둘째 단계로 한국인의 정을 기독교의 전통에서 이해되어지고 실행되어져 온 아가페적 사랑의 조명하에서 비교 분석했다. 셋째 단계로 지역사회의 절실한 필요에 친근하게 다가서서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적 공동체(가나안 농군학교, 다일 공동체, 온누리 외국인근로자 쉼터)들을 방문 조사하므로 먼저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교회 선교의 가능성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따뜻한 정과 기독교의 헌신적인 사랑이 적절하게 조합될 필요성이 있음을 제안했다.
Ⅰ. 왜 정인가?
1장은 논문계획서에 해당한다. 문제의 배경은 회심 성장의 정체와 타종교들의 도전과 한국화의 필요성이었다. 과제는 한국인의 내면세계와 행위규범의 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정이 선교에 온전한 우군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정이 복음과 합치되는 면들이 있었고 또한 복음과 어긋나는 면들이 있었다. 문제의 진술에 뒤따르는 부가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상층부 교리로 굳어버린 것과 성품과 행함이 따르지 않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현실과 한국인의 심성에 어울리지 않는 전도 방법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하나님은 한국인들의 정을 보존해오셨다. 정은 주로 종교적 토양에서 배양되었으며, 한국인의 세계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정은 한국적인 것과 복음의 가교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한국인의 정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의 기독교적 구현은 한국 교회의 선교 자산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폴 히버트의 ‘비판적 현지화’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체험을 강조한 종교학 이론들에 주목했고, 성품과 관련한 제반 학문이론들을 참고하였다. 나름대로 기대감이 있었다. 정의 지양적 재발견은 복음적이고 한국적인 선교를 촉진시킬 것이다. 타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저항감을 줄여 회심 기회의 저변을 확대시킬 것이다. 또한 기독교 신학, 성서학, 지도자론, 선교 방법 등에 새로운 전거가 될 것이다. 최근 점증하는 비정한 현실들과 정이란 주제를 택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다음과 같다.
Theoretical Framework
Korean Jeong
Hiebert’s critical contextualization (missiological)
Jeong as both threat and opportunity to church
Benedict’s culture and personality (anthropological)
Jeong as culturally patterned modal personality
Choi’s Korean psychology (indigenous-psychological)
Jeong as core constituent of Koreans’ social self
James’ religious affection (religio-psychological)
Jeong as feeling that reflects religious experiences
Allison’s high and low religion (religio-cultural)
Jeong as low theology of other religions in Korea
van Engen’s Scripture as a tapestry (hermeneutical)
Jeong as corresponding virtue of biblical love
Zahniser’s eschatological communitas(theological)
Jeong as corresponding virtue of church’s love
Irwin’s folk2religion and criteria(contextual)
Jeong as low theology of Korean Christianity
Rynkiewich’s types of moral reasoning (ethical)
Jeong as core constituent of Koreans’ heart-ethic
Muck’s Christian truth spoken in love (inter-religious)
Jeong as communication channel of rapport
Samuel’s mission as transformation (missiological)
Jeong as asset for community development
1) 점증하는 비정한 현실들
1960년대 이래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구가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최근 비정한 현실들로 뒤덮이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최근 10년 새 빠른 속도로 증가해 현재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2년 3,533명이던 자살자는 2002년 8,631명으로 두 배 이상 폭증했다. 이는 하루 23.6명으로 1시간에 1명씩 자살하는 셈이며, 자살률(5세 이상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의 수)도 1992년 9.2명에서 2002년 19.1명으로 두 배 가량 늘었다. 이는 헝가리 (27.4명), 핀란드 (21.2명), 일본 (19.9명)에 이어 OECD국 4위, 경찰청 통계(자살률 27.4명)에 따르면 헝가리와 함께 ‘공동 1위’다. 최근의 이러한 자살은 ‘고독이나 실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기 보다는 ‘충동적’이며 ‘카드빚이나, 급격한 가족해체’ 같은 사회적 문제가 원인인 자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의 2003년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해 결혼대비 이혼율이 47.4%에 이르렀고, 곧 50%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매년 결혼하는 2쌍 가운데 1쌍이 이혼하는 셈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미국(51%), 스웨덴(48%)이 한국보다 결혼대비 이혼율이 조금 높을 뿐, 이혼이 자유롭다는 노르웨이(44%), 영국(42%), 캐나다(38%), 프랑스(33%), 독일(30%) 등 대부분의 국가에 비해 한국의 이혼 빈도가 더 높았다. 또한, 결혼 후 3년 안에 이혼하는 부부가 전체 이혼소송의 절반을 차지하고 경제적 이유로 인한 이유도 10년 전 2%에서 14%로 늘어났다. 동 보고서는 “이혼으로 인한 가족해체가 점점 더 당연한 생애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의 최인섭은 대검찰청의 연간 범죄분석 보고서의 자료를 토대로 “일상생활의 많은 영역들에 있어서 한국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하나의 전형적인 증상으로서의 강력범죄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증가추세에 있다”고 지적한다. 강력범죄는 1974년에 24,926건 이었다가 1989년에는 38,114건, 1999년에는 59,367건으로 점증하다가, 급기야 2002년에는 292,528건으로 폭발적인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부친살해나 모친살해 같이 사회 전체를 경악케 하는 인면수심의 범죄들이 일간신문들의 일면을 자주 장식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한국 사회가 비정한 현실들에 병들어가고 있음을 잘 폭로하고 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규태는 정이 한국인의 정서구조의 한 핵심요소이며, 한국인을 “정에 살고 정에 죽는 민족”이라 정의한다. 이규태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비정한 사회현상들의 한 주요원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과학주의와 기계주의가 이런 이론들로는 나누어지거나 분석되어지지 않는 정을 무자비하게 유린함으로써 정이 증발해버린 것”이라 진단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는 정의 증발을 가속화시켰으며,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기주의라는 가시로 서로를 찔러 피를 내고 있다” 탄식하면서 이규태는 “상호관계적인 자아로서의 정체성 회복과 개인들 사이의 융화를 위하여 정의 재발견과 재발굴이 시급한 과제이다”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근대화의 단계를 넘어서 세계화의 복판에 다다른 한국 사회의 내부에서 정은 사회의 공정한 경쟁들을 위협하는 암초 같은 존재로 비난받고 있다. 이 비난의 논거에 따르면, 정으로 엮어진 학벌연줄이나 지역연고는 정치계, 경제계, 사법계, 교육계, 문화계를 가리지 않고 그 운영과 인사에 있어 사람들이 공정한 규칙들을 무시하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연줄들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이런 연줄들은 공익 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익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뇌물이 오가는 통로로도 빈번히 이용되었다. 한국사회는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히 연줄에 따른 통제(control), 분파(schism), 그리고 현상유지(status quo)를 묵인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정은 다양한 사회 집단 간의 의미 있는 화합 보다는 차별적인 편 가르기에 종사해온 바 크다. 정은 우리 편과 다른 편을 가르는 하나의 편협한 사적 집단주의 감정으로 전락해 버렸고, 따라서 그 안에 어떠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공적 윤리도 담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은 공정한 사회 경쟁의 적이다.
미국인 정치학자 프레드 앨포드(C. Fred Alford)는 한국인들은 악에 대해 애매모호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다는 관찰결과를 내놓는다. 앨포드는 그가 악의 개념에 대하여 한국인 대담자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 중 대다수가 “관계를 말해주면 악이 무엇인지 말해주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회피적인 태도에 대하여 앨퍼드는 “한국인들이 악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내어놓기를 꺼려한 이유는 어떤 것을 악이라고 밝히게 되면 자신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을 악이라고 부르게 되는 [정의] 연줄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해석한다. 앨퍼드는 한국들에게 있어서 악은 오히려 세계화 그 자체이며 이것은 “세계화가 [시장과 관료제라는 도구적 이성을 무기로 삼아]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최상의 가치로 삼고 있는 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지적한다. 나아가 앨퍼드는 “정은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라는 세계에 고립되어 있으며, 동시에 소외감과 좌절감에 싸여 있다” 덧붙인다.
경영학자 손정훈은 한국인들은 정의 연줄로 얽힌 사람들, 다시 말해 ‘우리’의 범위 내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쉬이 거짓도 말할 수 있고 잘못도 묵인할 수 있는 믿지 못할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손정훈은 “한국인들은 규정을 지키는 것 보다는 정과 같은 인간적인 정서를 고려하는 것에 우선성을 두고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지적하면서 “인간적인 감정에 따른 의사결정은 결국 온정주의나 편 가르기 등의 결과를 산출하기 쉬우며, 이는 필연적으로 불공정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주장한다. 한국인의 정과 미국인의 신용을 비교하면서 손정훈은 정이 법치주의에 큰 약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재 정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평가들을 수반하고 있다. 하나는 보다 더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사회현상으로 정의 증발이 한국 사회를 냉혹한 현실들로 몰아가고 있다는 평가이다. 다른 하나는 정실주의가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깨뜨리고 한국 사회를 불합리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는 평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모순되는 듯한 평가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답하자면, 서로 다른 사회의 영역들에 따라 발전의 정도가 달랐던 것이다. 최근 40년간 한국사회는 경제와 과학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새롭고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본적 인간관계들과 사유와 행위 방식에는 옛 뿌리가 살아 있다.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는 옛 정에 귀속되어 있으며 지적으로는 새 합리주의에 헌신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정과의 동일시는 지적 정당화의 부재를 초래해왔으며, 그들의 합리주의와의 동일시는 정서적 힘의 진공상태를 야기해온 것이다. 이렇듯이 한국사회 내에는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있으며, 정은 여전히 새 한국 속의 옛 한국적 요소로 존재하고 있다. 정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의 장애물로 비판받지만, 또한 정은 부드러운 관계성과 공감적 참여의 촉매제로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합리성의 결여는 공정한 경쟁력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정의 부재는 냉혹한 이기주의의 번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의 급속한 이행과정 속에서 한국 사회는 그간 사회의 근간이었던 기본적 인간관계들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들에 직면해 있다. 정이 증발해 버리자, 부모와 자식들, 스승과 제자들, 노년과 유년, 친구, 부부, 그리고 이웃 사이에 균열과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고 삽시간에 온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한국의 종교와 문화를 40년 가까이 연구한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ey Grayson)은 오늘의 한국인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1965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당시 한국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요즘은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충격을 받았다. 초고속전철의 생겼지만, 많은 노숙자들을 보았다. 60년대에는 굉장히 가난했지만 이렇게 많은 노숙자를 보지 못했다. 어렵지만 같이 나누고 도와주는 정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서구의 합리성이 배타적인 정의 연줄에 한 해결책이라면, 한국인의 정 역시 계산적인 합리성에 한 해결책일 수 있다. 서구의 합리성과 한국인의 정은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다. 정으로부터 파생된 부정적 사회 현상들은 분명히 합리성에 의해서 견제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을 합리성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 사회가 오늘 경험하고 있는 비정한 사회 문제들의 해결에 전혀 효과적이 아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져야 한다면, 그것은 합리성에 의해 견제된 정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절하 받았던 정은 최첨단의 개인주의 시대에 무너져가는 인간관계들의 회복과 화해에 일조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자원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격언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격언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정을 서로 나누어 의미 있는 일을 행할 때마다 강조되어 왔다. 몇 년 전에 한국의 한 항공사는 한국인 고객들의 축적된 마일리지의 일부를 기부 받아 귀국 행 비행기 표 삯을 마련할 수 없었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 시작 사흘 만에 고객 1200명이 1인당 1000마일씩 120만 마일을 기부했다. 회사도 30만 마일을 기부해 최종적으로 150만 마일이 모아졌고, 이 사랑의 비행기 표로 39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날 자카르타로 떠난 한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의 따뜻한 정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에 가게 됐다” 말했다. 과연 이러한 작은 정이 그간 비정한 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학대당하고 착취당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2) 정이란 주제를 택하게 된 동기와 과정
19세기 말 개신교 복음이 처음 한국에 전해졌을 때, 한국은 한이 서린 사회였다. 당시 평민들은 만성적 가난, 신분적 억압,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수동적 희생자들(victims)이었다. 한국인들에게 한은 하나의 내면화된 고통의 역사로서의 하나의 핵심 민족정서였다. 기독교의 복음은 한의 정서와 늘 쟁투해왔으며, 그것이 그간 무교의 굿이 담당했던 한풀이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던 한국인들 중에서 많은 수의 회심자들이 나타났다. 이에 상응하여 상당수의 한국의 기독교 학자들이 한의 정서, 무교,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하여 그들은 한 결 같이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한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데 있어서 무교의 영향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개신교 복음이 최초로 한반도에 상륙하던 그 때에, 한국은 또한 정다운 사회였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 ‘오는 정’과 ‘가는 정’ 뿐 아니라 ‘고운 정’과 ‘미운 정’이 넘쳐났었다. ‘정을 붙이고, 정을 통하고, 또 정을 떼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대중적이며 익숙한 사회현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적극적 능동인들(agents)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정은 하나의 내면화된 나눔의 종교로서의 또 하나의 핵심 민족정서였다. 기독교의 복음은 정의 정서와 늘 씨름해왔으며, 그것이 그간 불교와 유교와 도교와 무교에서 초점이 맞추어졌던 여러 형태의 정의 교류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던 한국인들 중에서 그 수용의 지경을 넓혀오고 있다. 한의 정서의 경우와 비교할 때, 거의 극소수의 한국의 기독교 학자들이 정의 정서, 타종교들, 그리고 기독교와의 연관을 연구해왔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까지 정의 정서를 경유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스며든 타종교들의 간접 영향력을 정확하게 가늠해오지 못하고 있다.
근대화와 세계화의 과정은 한국인들의 한의 정서를 극단화시키기 보다는 완화시킨 측면이 크다.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한 선진국으로의 이행은 한국인들의 한의 정서를 경감시키는 데 분명 일조했다. 이에 비하여, 근대화와 세계화의 여정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급속히 확산시킴으로써 상호적 나눔으로 대변되는 한국인들의 정의 정서에 철두철미하게 맞서왔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회상컨대, 정은 한국인의 종교성에 전반적으로 순행적이었던 데 반하여 그들의 세속주의에는 단호히 역행적이었다. 개신교의 경우에 있어서도, 정은 한국교회의 심령부흥운동들과 뜨거운 선교열정 폭발적 확산의 기폭제로서 역할을 담당해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정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신세대 젊은이들 사이에 세속주의가 활개치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하기 힘든 최근의 현실이다.
요약컨대, 정은 근대화와 세계화의 세찬 도전을 뚫고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내면세계와 행위규범 한 중심 요소로 생존해오고 있다. 나아가 정은 한국인들의 혼합주의적인 영적 세계를 여는 하나의 감춰진 열쇠이다. 한국인의 정은 불교의 세계관속에서는 무아와의 정이었다. 그것은 유교의 세계관속에서는 인륜과의 정이었다. 그것은 도교의 세계관속에서는 자연과의 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무교의 세계관속에서는 신령한 존재와의 정이었다. 한국인들의 깊숙한 세계관들을 반영하면서, 정은 보통의 한국인들 중에서 그들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종교성을 그들의 일상생활의 면면에 드러내왔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 도교의 도, 그리고 무교의 복 같은 드러난 종교적 덕목들 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잔잔한 정의 나눔을 통하여 더 빈번히 그리고 암묵적으로 그들의 종교성을 표현해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한국인들에게 정은 이러한 종교들의 한 하층신학으로 존재, 기능해온 것이다.
한국인의 정에는 신적인 존재들과 이웃들과 자아와 자연에 관한 보통의 한국인들의 궁극적 인생 문제들과 탐구들이 녹아내려 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정다운 삶 혹은 비정한 삶은 각각 도덕과 비도덕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생명과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듯이 정은 한국인들이 한국 종교들의 다양한 세계관들의 도전들을 그들의 마음 밭으로 응전한 하나의 ‘세계관적 신학’이다.
불교, 유교, 도교, 무교의 종교적 환경에서 주로 배양된 정은 19세기 말 기독교의 복음이 조우했던,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대중화된 ‘이전 지역 신학’이었다. 로버트 쉬라이터의 용어로 말하자면, 정의 복음에 장애물이었을 수도 있고, 또한 한국인들이 과거에 붙잡고 왔던 종교심의 발로로 복음의 준비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120년간의 개신교의 선교실험 뒤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목도하는 정의 현실은 무엇인가? 정은 결단코 복음에 의한 회심을 경험하지 않았다. 단지 과거 타종교들의 한 하층신학으로 자리했던 정이 이제는 기독교의 한 하층신학으로 새로운 둥지를 튼 것뿐이다. 과거에 불교, 유교, 도교, 무교의 한 하층신학으로 존재, 기능했던 정이 이제는 기독교에까지 한 하층신학으로서의 그 존재와 기능의 영역을 확대해온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의 개신교는 여전히 기독교적 회심에 비타협적인 정이라는 지역신학의 존재를 이제는 타 종교들이 아닌 그 자신 안에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너무 오랫동안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교회와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든 정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해왔다. 이 연구의 기본 동기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비정한 태만에 대한 반성적 고찰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연구의 핵심 독자층은 현재 사역하고 있는 한국의 목회자들이거나 교회지도자들이다. 이들을 염두에 두고 연구자는 이 연구의 세 가지 세부 동기를 밝힌다.
연구의 첫째 동기는 정의 신학화의 필요성이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식은 비중 높게 정 느낌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어떤 것에서 정을 느낄 때 비로소 그것이 실재한다고 체감한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앎이란 반드시 정 투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이 통교될 때 한국인들은 그 대상물을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한 걸음 알나아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정이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나누어져야 하며, 정은 그러한 것으로 한국인의 윤리적 삶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렇듯이 정은 한국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내재하고 있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규범적 요소이다. 유감스럽게 반드시 간 이 정의 정서의 존재와 기능이 한국인들에게 실제 미치는 그 심대한 영향력은 한국 개신교회의의 신학적, 교회적, 그리고 선교적 관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왔다. 에드워드 홀이 간파했듯이 이는 너무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그 내부자들에게는 문화가 감추어진 형국이다.
그간 한국의 개신교는 네비우스의 삼자원리의 한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가 한국문화권에서 개척되고 서너 세대가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기독교의 예언적 복음이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폴 히버트는 ‘제 4원리로서의 자기 신학화’를 제안하고 있으며, 이와 상응하게 연구자는 한국인의 한 핵심정서인 정의 신학화의 필요성을 인지한다. 한국인의 정은 한국인의 사회문화적 ‘현장’이요, 한국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며, 또한 한국인들의 내적 세계의 ‘알맹이’이다; 그런 것으로서, 한국인의 정은 신학적 검증을 위한 좋은 재료이다. 본 연구에서 정의 신학적 검증을 시도하므로 연구자는 ‘기독교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일 수 있는’ 한국인들의 신앙과 선교의 길을 모색한다.
연구의 둘째 동기는 정의 회심의 필요성이다. 정은 한국인의 교회와 선교 현장들에 그대로 스며들어왔다. 이러한 현장들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통제, 분파, 현상유지의 현상들은 정과 무관하지 않는데, 이것은 여전히 한국 교인들의 마음 밭 중심에 위치한 정이 부정적으로 구현되어왔기 때문이다. 정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옛 종교들의 세계관적 요소들 – 무교의 조작적 신들 달래기, 유교의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인륜질서, 불교의 책임질 수 있는 개체자아의 부재, 그리고 도교의 무위자연으로의 은둔 – 을 그 안에 수용해오고 있다. 옛 종교들의 각양각색의 세계관들로부터 유래된 이러한 정의 요소들은 쉽사리 인간 심성의 부패한 부분들과 융화되어 왔으며, 새 이기주의의 발호는 이 비참한 정의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악성의 정은 기독교적 회심을 경험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정의 회심은 곧 세계관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간 옛 종교들과 제휴관계를 있었던 한국인의 정은 이제 복음의 새로운 세계관속에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정의 회심은 한국인의 교회와 선교 현장들에서 각각 통제에서 증거(witness)로, 분파에서 화해(reconciliation)로, 그리고 현상유지에서 부흥갱신(revival & renewal) 현상으로 변혁되어짐을 위한 한 주요 자원이다. 본 연구에서 정의 회심을 요청하므로 연구자는 ‘마음의 선함’과 동시에 ‘머리의 명석함’으로 견인되어지는 한국인들의 신앙과 선교의 길을 모색한다.
둘째 동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연구의 셋째 동기는 정의 지양화의 필요성이다. 한국인의 정은 한국인들의 경험들, 사회관습들, 그리고 사회변동들을 그 안에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했듯이 정은 타종교들과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화의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기준 없이 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복음주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이 연구에서 성서의 최고권위를 바탕으로 한 종합 기준들에 의거한 정의 비판적 수용을 주장하므로 연구자는 타종교들의 이해에 겸손히 열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성서의 증거에 진정으로 충실한 한국인들의 신앙과 선교의 길을 모색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들 중 하나는 거센 세속주의의 물결이며, 또한 이 물결의 요동으로부터 분기된 셀 수 없는 비정한 사회 현실의 잔물결들이다. 이러한 비정한 세속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부여하는 가치와 덕성으로 ‘인간답게’ 변할 필요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는 이 과업의 중심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본 연구에서 기독교의 사랑과 타종교들의 자비의 덕목들 사이의 다리로서의 한국인의 정이 어떻게 한국인에 의한, 또한 한국인 중에서의 선교의 우군으로 ‘거듭날’ 수 있는 지를 논하고자 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정에 굶주린 사람은 정을 먹어야만 산다. 그런데 아무나 정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정은 받아 누려 본 사람만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 마음은 이렇듯이 ‘빚진 자의 마음’이다.
요약하자면, 한국 개신교회는 최근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삶의 와중에서 차가운 마음이 만연한 사회상에 직면하고 있다. 이혼율 증가, 자살률 증가, 그리고 강력범죄율 증가는 이를 가리키는 사회지표들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정의 연구는 한국인에 적합한 화해적이고 평화적인 교회 선교의 방식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Ⅱ. 무엇이 정인가?
한국인의 정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에게 있어서 정은 가족 공동체에서 그 기본이 형성되고 마을 공동체에서 그 외연이 확장되어지며, 나아가 종교공동체와의 접촉을 통하여 그 의미가 심화되어졌다.
1. 정은 한국인의 심층 심리이다.정은 상호의존하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이다.
2. 정은 애착적인 사회적 관계이다.정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회적 요소이다.
3. 정은 종교적인 체험의 소산이다.정은 약자와의 애착적인 유대이다.
한국인들의 정의 정수는 그들이 정의 관계에 있어서 약자와 동정적 애착을 가지게 될 때 표출된다. 그들의 정이 가지는 도덕적 속성은 역사를 통하여 계속된 그들의 종교 전통들과의 정겨운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인의 정은 한국인의 대중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정은 그들의 종교 전통들의 핵심 덕목들을 반영한다. 한국인들의 종교전통들(무교, 불교, 유교, 도교)은 그들의 ‘정감적’ 세계관의 중심요소들이며, 그 중에서도 무교와 불교는 그들의 세계관을 받치는 두 기둥들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은 이승과 저승을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국의 종교 전통들 역시 한 편으로는 탁월한 이상을 표방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못 미치는 실행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한다.
먼저 이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교는 저승으로의 일시적 초월을 통한 영적 존재들과의 결합을 통해 이승의 문제들의 해결을 꾀하는데, 이러한 심정적 추구를 ‘기복’이라 한다. 불교는 이승과 저승의 본질적 일치 혹은 순환에서의 자아의 개념의 공허함을 말하면서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주문한다. 유교는 저승은 이승의 연장일 뿐이며, 대동사회의 실현은 어진 마음의 계발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도교는 이승이 저승에 내재하기에, 그 자연스러움의 세계로 복귀하려는 마음을 중요시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정이 이러한 종교적 덕목들과 맞물려 들어갈 때, 그들의 정 관계는 약자와의 심정적 연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교는 영적 존재들을 달래려는 시도들로 종종 환원되며,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조작의 관계로까지 진전된다. 불교가 모든 생명체들의 근원적 상호의존성에 강조점을 둘 때에, 이 역시 개체 자아의 책임성의 약화로 종종 이어진다. 유교가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기울어질 때, 사회는 차별에 의해 계급화 된다. 도교가 무위의 형식만을 취할 때에 이는 곧 도피적인 은둔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정이 이러한 종교적 현상들과 맞물려 들어갈 때, 그들의 대중적 종교성은 영적 존재들이나 운명이나 의례나 기운과의 애착적인 관계로 특징 지워진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애착적인 관계들이 인간본성의 부패한 부분과 맞물려 들어갈 때, 그들의 정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조종과 파당과 현상유지의 덫에 빠져들게 된다.
한국의 종교 전통들은 나름대로 최고신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무교의 ‘한님’, 불교의 ‘공’, 유교의 ‘하늘’, 그리고 도교의 ‘조기’는 최고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최고신들과는 정 관계가 잘 맺어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종교전통에 있어서 정은 최고신의 존재와 역할이 축소되거나 배제된 이원관계 혹은 이겹줄 관계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곧 최고신이 한국인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에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주지 못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발견은 이슬람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의 계시와 이슬람의 계시(tanzil)는 그 정다움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낸다. 성삼위 하나님의 계시는 정다운 관계인데 비하여 이슬람교에 있어서 최고신과의 관계는 정다운 관계가 아닌 듯하다.
Ⅲ. 정과 사랑은?
기독교 사랑의 독특성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성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가 가능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한 사람의 적절한 반응은 성결, 공감, 환대, 보전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한국인의 정이 보이는 약점을 충족시킬 수 있다. 정과 사랑은 ‘같지만 다른’ 것이다. 정은 정감적 요소로 체화되어온 측면이 있고, 사랑은 의지적인 요소로 체득되어온 측면이 있다. 따라서 마음 따뜻한 정으로 시작하여 확고부동한 의지로 마무리 짓게 된다면 이는 매우 효과적인 조합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적인 요소를 동반하고 또한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실천을 지시하는 심리적이고 사회윤리적인 덕목이었다. 또한 사랑은 관계적인 속성을 지니며 또한 공동체를 창출하는 기능이 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봉사에 있어서 일반인들의 거부감을 줄여가며 신뢰성을 쌓아가는 선교공동체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인의 정과 기독교의 사랑이 어울려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곧 한국인의 정이 가지는 따뜻한 마음이라 요소와 기독교적 사랑이 지니는 헌신이란 요소가 선교행위에 있어서 상호유익하게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속인이나 타종교인 중에서의 선교는 마음 따뜻한 증인이 될 때 보다 더 효과적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의 정이 가지는 기회요소들과 위협요소들이 상존한다. 정의 기회요소들과 기독교의 사랑이 적절하게 접맥된다면 한국교회의 선교는 성서적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적일 수 있다. 교회는 선교는 따뜻한 정과 헌신적 사랑에 맞추어 이에 걸맞은 인격과 공동체의 형성이 병행되어야 한다. 대결지향적인 선교의 방식에서 벗어나 서로를 따뜻한 마음으로 얼싸안는 정의 긍정적 요소가 교회의 선교에 적합하게 반영될 때 여전히 정의 심리를 중요한 삶의 한 부분으로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신뢰성을 얻어낼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정이 기독교의 사랑에 의해 완성되어진다면 한국 선교의 ‘세계화’도 가능하다.
《Jeong and Agape》
⑴ Jeong is affectionate attachment, fostering an intimate dyad. It bears strength in interpersonal relationship. It may help Christians to keep a close tie to the triune God.
⑵ Jeong is other-centered heart. It is marginal, vulnerable, and compassionate morality. It may help Christians to turn their priority concern to those in difficulties.
⑶ Jeong is warm bonding to community. It is emotional and relational palliative for social harmony. It may help Christians to embrace those with broken heart in a segmented society.
⑷ Jeong is particular narrative. It is person’s life story interwoven with specific place and historical condition. It may help Christians to reconsider the destination of the creation.
⑴ Agape is grace given by the triune God who is love and who first loves us (1 John 4). It represents an intimate triad in which God is centered. It shapes us into a community of witnesses to God’s kingdom (Acts 1:8).
⑵ Agape is self-renewing heart. It is self-affirming and also self-giving in Jesus (Philippians 2-3). It is the self’s single-heartedness toward God who is compassionate to those in difficulties (Luke 6:35-36).
⑶ Agape is boundary-crossing fellowship. It is open-hearted to outsiders, welcoming them as guests sent by God (Genesis 18). It is to make room for others’ reconciled relationship with God (2 Corinthians 5:20).
⑷ Agape is ecological story. It is our daily care for creation within God’s cosmic plan of new creation (Genesis 1:26-28; Revelation 21). It is to join the Spirit of God who wills to restore the whole creation to shalom.
주요 발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인의 정의 관계가 최고신과의 친근한 관계가 확고하지 못한 이원관계 혹은 이겹줄관계로 표출되고 있다. 둘째, 감정은 종교적 경험과 기독교 신앙을 아우르는 중요한 요소이다. 셋째, 기독교 사랑의 독특성은 성삼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삼원관계 혹은 삼결줄관계이다. 한국인의 선교는 정 때문에 복음이 마음이 따뜻한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용이하다.
약 17년 전에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는 520쪽에 달하는 그의 책의 결론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란 정통교리에는 전문가들이었지만 사랑이란 정통실천에는 초보자들에 불과했음을 지적했다.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셀 수 없는 회의들이 열렸지만,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어떻게 최고계명인 사랑을 실행에 옮길 것인가에 대한 회의는 개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27일에 한양대 개교 70주년 기념에서 ‘사랑의 실천’을 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학위논문 개요를 통하여 한국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실천은 정의 지양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지난 10월 23일에 목회상담학자 제임스 폴링이 한국을 방문하여 미국목회학에 한국이 기여할만한 그 무엇인가를 세 가지 뽑았는데, ‘한(恨)’과 ‘정’과 ‘살림’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들은 극단의 모순 속에서도 공존한다는 점이 경이롭다”고 말했다. 자기들이 뽑은 대통령이라도 순식간에 촛불을 들고 모이는 응집력을 두고 말한 것이다. 정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뿐 아니다. 한의 정서가 정의 정서에 의해서 완화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Kim, Woo Cheol
2006 “Korean Jeong and Its Relationship to Christian Mission.” Ph.D. dissertation, Asbury Theological Seminary, Wilmore, KY.
김우철
2008 「기독교 선교학」 (서울: 쿰란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