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에 호의적인 이슬람, 무역으로 지구 절반 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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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로 지은 이슬람식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뒤엉킨 채 누워 있다. 얼마나 깊이 잠에 빠졌는지 불편한 자세에도 깨어날 기색이 없다. 대부분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으며, 팔에 금색 완장이 있는 긴 옷을 입고 있다. 자세히 보면 잠이 들지 않은 사람도 두 명 있다. 가운데에 서 있는 푸른 옷의 인물과 왼편에 있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다.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까?

이 그림은 이라크의 유서 깊은 오아시스 도시 와싯(Wasit)에 있는 건물을 묘사하고 있다.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슬람 상인들이며 이들이 누워 있는 건물은 사막을 건너 교역을 하는 대상(隊商·caravan)이 머무는 숙소인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팔에 두르고 있는 띠는 티라즈(Tiraz)라는 장식으로, 처음에는 통치자가 국영 공방에서 제작해 귀족과 관료들에게 하사했다가 점차 민간으로 이용이 확산되었다. 자세히 보면 눈을 뜨고 있는 두 사람은 잠에 빠진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빼내고 있다. 일부러 약을 탄 음식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하고는 소지품을 훔치는 현장이다.

이 그림은 알와시티(al-Wasiti)가 그린 13세기 작품으로, 알하리리(al-Hariri)가 저술한 고전 문학작품 『마카마트(Maqamat)』에 삽입된 것이다. 원작 자체의 스토리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우리는 중세 이슬람 무역상들이 겪었음직한 위험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험난한 사막을 고생스럽게 통과해 오아시스 마을에 무사히 도착한 뒤 상인들은 안도하면서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이들이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닥쳤다.

1. 알와시티, 『마카마트』, 1237년

2세기부터 낙타를 운송에 본격 활용

사람들이 낙타를 운송에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이었다. 낙타는 말이나 노새보다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고, 특히 사막을 건너는 데에 탁월했다.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을 관통하는 일은 상인들에게 고통스러웠지만, 대신에 사막에는 강이나 밀림이 없어서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았고 맹수의 위험도 없었다. 또한 기후가 건조해 병원균이 서식하기 어려웠으므로 질병에 걸리거나 물건이 변질될 위험도 적었다. 이런 이점들이 상인의 육체적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대상무역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슬람 상인들이 육로만을 이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중해에서 유럽인과 교역을 하고,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항해한 후,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가로질러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그림 2는 페르시아만을 항해하는 선박을 묘사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선실에 탄 승객들은 모두 흰 피부에 색색의 터번을 두른 모습인 반면 선상에서 일하는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검은 피부를 지녔다. 이렇게 두 집단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배를 모는 선장과 선원은 인도인이고 승객은 이슬람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장거리 무역의 실세는 이슬람 상인이었던 것이다.

이슬람 상인들의 해상 활약상은 대단했다. 지중해에서 유럽인과 거래한 이들은 페르시아만이나 홍해를 거쳐 인도양에 이르렀다. 이들은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남아시아에 도달했고, 심지어 동아시아까지도 건너가서 무역을 했다. 압바스 왕조(750~1258)를 배경으로 하는 신밧드(Sindbad)의 모험 이야기는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슬람인들의 관심과 동경을 잘 보여준다. 이슬람 상인들이 무역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 알와시티 『마카마트』, 1237년.

역사가들은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볼 때 상업에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슬람 통치자들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도 국가에 인두세만 납부하면 경제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했다. 카라반세라이를 지어 국가에 기부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술탄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인과 제조업자 동업조합원들이 자신들의 대표 상품을 들고 행진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거행했다. 동업조합은 기술을 표준화하고 공급량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지만, 장거리 무역업에 따르는 위험을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산하는 보험 역할도 담당했다.

알칼리·알코올 등도 이슬람이 남긴 유산

그림 3은 이런 행사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스탄불에 있는 대형 경기장을 보여주는 이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앉아 있고, 오른편으로는 많은 관객이 3층 공간을 채우고 있다. 행진을 하는 사람들은 방직업자 동업조합의 일원들이다. 이들은 화려한 문양의 상징물과 아름다운 직물을 높이 들고 행진하면서 술탄과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명품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 국가정책에 힘입어 이슬람 상인들은 국제적 경쟁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경제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324년에 있었다. 사하라 이북의 아프리카는 10~12세기에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 종교적 통일은 이슬람 경제권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13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중심국으로 등장한 말리제국은 14세기에 이슬람권 전역에 금을 공급하는 생산지로도 명성을 떨쳤다. 1324년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만사(황제) 무사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순례행렬에는 1만2000명에 이르는 노예가 포함되어 20t 이상의 금덩이를 수송했으며, 80마리의 낙타가 따로 수t에 이르는 사금을 날랐다고 한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부자였을 만사 무사는 순례 길에 거친 카이로와 메디나에서 빈민들에게 금을 나눠주었고, 그곳 상인들로부터 각종 물품을 비싼 값에 구입했다. 그 결과로 이 도시들은 물가가 갑자기 크게 오르는 현상을 경험했다. 개인적 행위가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었다.

3. 『축제의 책(Surname-i Vehbi)』, 1582년

이슬람 세계의 힘이 무슬림의 상업적 수완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학·의학·과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11세기에 이븐 시나(Ibn Sina)가 저술한 의학서는 중세 유럽대학에서 기본 의학서로 채택되었으며, 1206년에 알자자리(al-Jazari)가 저술한 『천재적 기계장치 지식에 관한 책』에는 100개가 넘는 기발한 기계장치들이 소개되어 있다. 1574년에 타키 알딘(Taki al-Din)이 건설한 이스탄불의 천문대에서는 학자들이 모여 첨단의 측량 기구를 개발하고 역법을 발달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알칼리, 알코올, 알케미, 알고리즘과 같은 용어는 화학 분야에서 이슬람 학자들이 이룬 뛰어난 업적을 짐작하게 한다.

이슬람 세계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널리 수용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은 세계사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9세기에 수도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Bayt-al-Hikam)’에서는 이슬람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저작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이렇게 번역된 저작들은 이슬람 세계 곳곳에 위치한 도서관들로 보내졌는데, 이것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 재정복운동 과정에서 서유럽 기독교 세계로 전해졌다. 

또한 15세기에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그곳의 학자들이 이슬람 세계로 이주해 와서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유럽의 부흥을 낳은 르네상스의 학문적 초석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다. 기독교 유럽인들이 중세 내내 주적으로 간주했던 이슬람 세계가 훗날 유럽이 번영할 토대를 닦아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100퍼센트 악(惡)이나 100퍼센트 선(善)이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문화권, 어떤 경제권이든 간에 나름의 장단점을 지녔기 마련이다. 이슬람에 의한 서유럽으로의 지식 전파는 오늘날 바람직한 세계화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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