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요가를 해서는 안됩니다(요가.뇌호홉.기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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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요가를 해서는 안됩니다(요가.뇌호홉.기체조).

요가는 단순한 운동, 스트레칭, 다이어트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요가는 몸으로 하는 힌두교의 의식입니다.

이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나쁜 흑암의 세력을 자기도 모르게 경배하고 섬겨 그 영과 합일(일치)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요가를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서가 차분해지며 육체적인 피로도 많이 풀린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요가’는 단순히 유행처럼 지나가는 바람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미 요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심신 단련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사회 안에서 안정되게 정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집이나 직장 인근의 요가센터, 구민 복지관, 백화점 문화센터, 학원, 노인 대학, 심지어 교회에서도 요가를 가르칩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요가는 가장 인기있는 강좌 중 하나이고, 초등학교 방과 후 학습 시간에 요가를 가르치는 곳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기도의 모 교회의 경우는 요가 강습을 알리는 광고를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요가 수강생들을 교회 안에서 모집하기도 합니다.

정말 이 ‘요가’는 단순한 심신 수련, 스트레칭의 한 방법일까요?

요가라는 말의 뜻은 ‘결합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이 ‘결합’이란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눈가림에 불과하고, 실은 어떤 절대자와의 결합이며, 그 절대자는 힌두교에서 섬기는 신입니다. 
즉 요가는 몸으로 하는 ‘힌두교식 기도, 명상’입니다. 
요가의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불교와 힌두교에서 자신들의 신과 합일(한몸이 되는) 종교 의식과 일치합니다. 
다이어트, 스트레칭, 명상이라고 위장된 요가는 단순한 건강 단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힌두교 종교 의식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요가의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 속에 있는 쿤달리니(뱀)을 자극하여 그 뱀이 용트림하듯 또아리를 틀어올리게 한다는 것인데,

일곱 가지 챠크라라는 방법을 통해 내 몸 안에 있는 쿤달리니(뱀)을 자극한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요가를 하는 사람을 보면 온 몸을 이상한 모양으로 꼬고 비틀고 하는데, 그것은 가장 뱀과 유사하게 만드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경지까지 갈수 없으니 낮은 단계의 챠크라인 스트레칭이나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챠크라가 바로 성을 자극하는 챠크라이며, 마지막 일곱번째 챠크라에 도달하면 해탈의 경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가가 힌두교식 기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이방 종교 의식을 우리 삶 속에서 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요가가 비만 해소와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며 몸을 유연하게 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현재 한국의 요가 인구는 약 1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요가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요가에는 불살생, 불탐, 주문 외우기, 고행, 요가 호흡, 불교의 선, 인도 철학, 윤회설, 수행 등의 혼합된 양상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그러면 요가를 지속적으로 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요가를 지속적으로 하게 될 때 우리의 몸과 마음, 생각은 자연스럽게 불교, 힌두교 등의 이방 종교의 나쁜 것들에 노출됩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 혹은 심신의 수련과 차분한 정서를 갖고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별 생각없이 하는 요가가 흑암의 세력과 나쁜 영들에 노출되는 통로가 되며, 심지어는 이방 신들과 접촉하는 결과까지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한 크리스천의 삶에서 요가를 허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요가를 통해 얻어지는 차분함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아닙니다. 요가를 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방 종교식 기도를 하며 이방 신들과 접촉하는 통로를 열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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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 두 교 
■ 힌두교의 역사와 개요

초기에는 다신교(아그니 신:불의 신, 인드라 신:전투 신)였다. 현세의 이익과 욕망(자식, 비 등)을 바람으로서 지극히 현세 중심이었고 신에 대해 찬미함으로 신을 숭배했다. 이 다신교는 태양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빛을 주고 저녁에는 쉰다고 생각함으로 태양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태양이 아침마다 일어나 빛을 바라지만 그것은 순전히 브라만(사제)의 제사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태양신보다 사제가 우월하게 되었다. 이것은 카스트 제도의 가장 위층인 브라만 계층이 중심이 됨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정복기였지만 정착기에 들어가면서 일원론을 강조한다.

일원론은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는데 ‘우파니샤드’를 강조한다. 우파니샤드의 핵심은 명상과 요가를 통해서 범아일체를 깨닫는 것인데 ‘범’이란 우주의 최고 원리(대우자)를 말하는 것이고 ‘아’란 아트만으로서 인간의 순수한 영혼(소우주)을 말한다. 그러나 이 우파니샤드는 너무 어렵고 비인격성을 가진데다 대중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신교, 희생제사, 일원론을 종합한 박티 신앙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우파니샤드가 너무 어렵기에 대안이 된 것으로 바가바드 기타가 경전이 된다. 이것은 거룩한 노래란 뜻으로 700개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고 간디가 이용을 했다. 유신론으로서 인격적인 신앙을 주장한다.

■ 인생의 목적(인생관) 
☞욕망의 길

(1)쾌락: 도덕적인 규칙 안에서 “즐길만큼 즐겨라”라고 말한다. 즉 즐거움(감각적)을 추구한다. 이 쾌락이라는 것은 긍정적이나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데 이유는 쾌락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또한 인간성 전체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좁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2)성공: 인생의 두 번째 목표로써 좀 더 사회적인 차원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재산과 명예와 권력의 3면을 가진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라고 말하는데 쾌락의 길을 포기하고 극복해야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여기서도 부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세속적 성공은 독점적이므로 경쟁이 있고, 따라서 위태롭다. 또한 이것들은 아무리 추구해도 만족시킬 수가 없다.

-쾌락과 성공을 장난감으로 취급하며 장난감은 어린이가 가지고 노는 것이고 어른이 가지고 놀만한 것이 안 되듯이 쾌락과 성공도 성장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버림의 길 
(3)의무: 공동체 안에서의 의무 수행 즉 사회적 봉사를 추구한다. 쟁취에서 봉사로, 얻으려는 것에서 주고 싶어하는 것으로, 승리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그들의 목적이 된다. 이것은 세속적 욕망을 포기해야 가능하나 이것도 세상 안의 가치다. 이런 의무는 보람을 안겨주고 자부심이 생기나 희구를 궁극적으로 채워주지 못하고 사람의 욕망을 감당할 수 있는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4)자유: 인간의 무지함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무한한 중심이며 감추어진 자아 즉 아트만(브라만)을 추구한다. 해탈을 통해서 근원적인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 4가지 완성의 길

-요가란 뜻은 길, 방법이며 인간의 진정한 목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요가를 한다. 그런데 사람은 각각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맞는 것을 찾아서 수행한다.

(1)즈나나 요가: 지식(즈나나)을 통해서 해탈과 아트만을 추구한다. 이 길은 어렵고 가파른 길인데 분석적이고 사변적인 사람이 행하는 것으로 경전을 공부하면서 분별, 분석하며 사색한다.

(2)박티 요가: 박티의 목표는 자신을 신과 일치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체가 신을 찬미하는 것이다. 인격 신(수 많은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 봉헌으로 이루어 지는데 밥을 먹어도 신을 위함이고 잠을 자도 신을 위함이다. 그리고 보상이나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으로 가장 대중적이며 인기가 높다.

-즈나나 요가는 우주와 자신을 일치시키며 신성을 내부에서 발견하려고 한다.(비인격성) 
박티 요가는 신과 인간을 분리시키며 신성을 외부에서 발견한다.(인격성)

(3)카르마 요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노동을 통해서 신을 찾는 길이다. 감성이 강한 사람은 그 일이 자신에 미치는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일을 신에 대한 봉사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해 추진되며 신을 위하여 수행되는 신의 힘이 구도자를 통하여 나타나 그것에 의해 처리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4)라쟈 요가: 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 심신 단련, 명상을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사람이 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요가를 해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요가라는 말은 바라문교의 교리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수행과정에 익히는 정신과 육체의 체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세와 호흡을 가다듬어 정신을 통일 ·순화시키고, 
또는 초자연력을 얻고자 행하는 인도 고유의 수행법을 말합니다.
요가란 말은 산스크리트로서 결합한다는 어원(語源)인 유즈(yuj)에서 시작되었으며, 
마음을 긴장시켜 어떤 특정한 목적에 상응(相應) 또는 합일(合一)한다는 의미입니다.

인도에서는 육파철학(六派哲學), 즉 
1. 베 다(Veda)를 중심으로 하는 미만사(Mimamsa:聲論派)와 
2. 베단타(Vedanta:吠檀多派), 
3. 논리적 특징을 중시하는 니아야(Nyaya:正理論派)와 
4. 바이세이시카(Vaiseisika:勝論派), 
5. 우파니샤드(Upanisad》를 중심으로 하는 상키아(Samkhya:數論派)와 
6. 요가파(瑜伽派)로 발전하였으며, 
당시의 모든 학파는 그 실천방법으로서 요가를 수련했습니다.

범신론적이고 다신론적인 사탄의 종교에서 그 실천수행의 기본자세가
요가라는 체조와 비슷한 행위로써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요가를 하다가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빠졌고
인도의 갑부들은 미국의 여관업과 주유소를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힌두교 채널을 돌리면 요가의 대가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신들과 합일됨으로 신체부양(몸이 공중에 들려 올라감)술로 
전 미국 사람들을 유혹하여 기독교를 버리고 힌두교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요가는 약 5,000년 전의 유물로 추정되는 시바신상(Siva 神像)에서 
요가의 기본자세인 결가부좌(結伽趺坐)를 볼 수 있으며, 
BC 1000년경에 쓴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에는 
요가의 종류와 실천방법이 적혀 있고, 파탄잘리(Patanjali)가 쓴 
《요가경전 ,4세기경에는 요가의 수련과정을 8단계로 체계화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요가의 기원은 6,000~7,000년 전의 인더스문명 시대까지 올라가며, 
그 수행법(修行法)은 인도 아리안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고대의 브라만교나 불교에서도 요가를 실천하였는데 
그 후로 종교대가와 성현들을 배출하면서 
여러 가지 유파(類派)로 발전하여 그 종류가 많지만, 
어떤 수행 방법과 철학을 중점적으로 수련하느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첫 째 . 바크티요가(Bhakti yoga: 감정순화에 의한 獻身의 요가), 
둘 째 . 지나나요가(Jnana yoga: 이성 개발에 의한 지식의 요가), 
셋 째 . 라자요가(Raja yoga: 심리적 통제에 의한 심신과학의 요가), 
넷 째 . 카르마요가(Karma yoga: 사회활동에 대한 행동규제의 요가), 
다섯째. 탄트라요가(Tantra yoga: 慾情統制에 의한 육신해방의 요가), 
여섯째. 하타요가(Hatha yoga: 陰陽調和에 의한 심신조화의 요가) 
일곱째. 쿤달리니요가(Kundalini yoga; 신경력을 개발하는요가) 
여덟째. 만트라요가(Mantra yoga: 발성(發聲) 통제를 통한 聖呪요가) 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요가의 목적은 얼른 듣기에 매우 유익한 것 같고
또 듣기게 따라서는 합리적인 수양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大宇宙]은 변화 ·조화 ·안정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인간[小宇宙]의 심신의 변화도 이 자연의 흐름에 따르기 때문에 
대우주와 조화를 이루려는 활동, 즉 생명현상이 간단없이 일어나며, 
요가의 수련과정은 모두가 정신력을 개발하고 육체를 강화하는 목표를, 
평형상태의 유지와 조화에 두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은 힌두교의 신들과 
합일을 이루는 뱡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요가와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새벽에 일어나 차를 타지 말고 걷거나 뛰어서 
교회까지 가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기도하고 그래도 시간이나 힘이 남으면 마을 앞에 나가서
휴지를 줍거나 마당을 쓸면서 봉사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노우호 목사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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