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 잔당이던 IS, 미국 중동정책 실패·종파분쟁이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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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격인 ‘ISI’ 

미군 반격에 2011년 소멸 위기 

지도자 바그다디가 수니파 결집 

종파분쟁 이끌며 조직 재건 성공 

시리아 ‘누스라전선’까지 이끌어 

2013년 두 조직 통합 ‘ISIL’ 탄생 

미국을 다시 중동의 전면전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 중동 역내 국가의 분쟁, 수니파와 시아파 종파분쟁 등 중동의 오랜 분쟁 역사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미국과 중동의 모든 세력들이 이슬람국가의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아무도 원치않는 이슬람국가의 약진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거의 소멸되가던 알카에다 잔당 세력이 이슬람국가로 도약하게 된 과정을 3회에 걸쳐 싣는다.


2011년 8월 어느 날 밤. 시리아 동북부 하사카주와 접경한 이라크 국경 지역의 밀수 통로를 8명의 남자들이 은밀히 지나갔다. 30대 중반의 아부 모하마드 알 골라니(혹은 알 줄라니)를 지도자로 하는 이라크 내 알카에다 대원들이었다. 시리아 쪽에서 골라니 일행을 맞이한 이들은 세드나야 군사형무소에서 막 출소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이었다. 이날 사건이 앞으로 시리아와 이라크 내전의 향방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지는 그들도 몰랐다.

당시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격인 ‘이라크이슬람국가’(ISI)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시리아에 알카에다 지부를 창설하는 임무를 이들에게 맡겼다. 쇠락하던 조직의 활로를 찾으려는 방편이었다. 그 때 시리아에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항거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들이 잠입할 때 시리아에서는 의심스런 대규모 석방과 사면 조처가 실시됐다. 그해 3월15일부터 전국으로 확산된 반정부 민주화시위가 계속되자, 아사드 정권은 5월 “정치운동에 관여된 무슬림형제단의 모든 대원들과 다른 구속자”들의 석방과 사면을 명하는 칙령 61호를 발표했다. 6월에는 칙령 161호와 53호를 통해 비상조처도 해제했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세드나야 군사형무소에 주로 수감됐던 700명이 넘는 이슬람주의 과격세력들이 석방됐다. 아사드 정권은 석방되는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곧 무기를 들고 항거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석방된 이들 역시 아사드 정권이 자신들의 무장항거를 대대적인 탄압의 명분으로 활용하려고 자신들을 석방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에서 넘어온 골라니 일행과 시리아 내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연계는 곧 벌어질 내전에서 알카에다, 특히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의 개입을 예고했다.


골라니를 시리아에 보낼 당시 이라크이슬람국가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등 전임 지도부가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등 잔인하고도 과격한 노선으로 대중들로부터 고립됐다. 2007년부터는 증강된 미국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알카에다 세력이 가장 극성했던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에서 2008년 2월 미군이 노획한 알카에다 현장 지휘관의 서한은 이를 잘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에 반대하는 이들이 단결하도록 도왔다. 우리는 작전을 진행하거나 조직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포위망에 갇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이 지휘관은 자신들의 조직이 ‘비상한 위기’ 상태라고 진단했다.

골라니 일행이 시리아에 잠입하기 두달 전인 6월 미군은 이라크이슬람국가의 최고 지도부 42명 중 80%가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8명만 남았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내의 공격행위와 사상자 수는 미군이 침공한 2003년 이후 최저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이라크내 알카에다 세력이 존폐 위기에 놓여있던 2011년 5월16일 지도자로 등장한 이가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다. 바그다디는 우선 붕괴된 지도부 재건에 나섰다. 그는 철저히 이라크 수니파를 중심으로 그 공백을 채웠다. 알카에다 본부와의 단절과 외국 출신의 기존 알카에다 세력이 사라진 상황도 배경이지만, 이라크 국정운영에서 소외된 수니파의 불만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의 원조인 자르카위는 요르단 출신이었고, 그 지도부는 외국 출신의 지하디스트들로 주로 채워졌었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의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바그다디는 조직을 수니파화하면서 이라크 현지 수니파 부족과 주민들의 우려와 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획책한 것은 수니파의 불만에 바탕한 종파 전쟁이었다. 

바그다디는 후세인 치하에서 일했던 바트당의 군사, 정보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영입했다. 후세인 정권에서 군 장교를 지낸 하지 바크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라크이슬람국가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바그다디의 고위 지휘관 25명 중 3분의 1이 후세인 시절 정부군 출신이었다. 알카에다가 증오했던 후세인 세력 영입은 안팎에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후세인 세력들이 여전히 갖고 있던 군사 능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한편 수니파 무장세력들을 이라크이슬람국가 주위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바그다디가 조직 재건에 몰입하고 있을 때 시리아 사태가 터졌다. 바그다디는 접경한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동북부에 살고 있는 수니파들이 부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양쪽 수니파 모두가 이제는 비주류로 전락한데다, 내전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두 나라 접경 지대 수니파들이 묶일 수 있는 공감대가 더 커진 상황이었다.

시리아에 잠입한 골라니는 세드나야 군사형무소에서 출소해 세포조직을 형성한 이들과 접촉했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조직이 출현할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많았다. 골라니가 시리아에 온지 4개월여 만인 2011년 12월27일 다마스커스의 국가보안청 청사 공격으로 첫 작전을 벌였다. 한 달 뒤인 2012년 1월23일 ‘누스라전선’ 결성이 발표됐다.

이 때 알카에다와의 연계는 숨겨졌다. 골라니는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보여줄 것이다. 주민들과 잘 지낸 다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다”라고 조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이는 골라니 자신의 전략이기도 했고, 미군에 사살당한 오사마 빈라덴의 뒤를 이어 알카에다 지도자에 오른 아이만 자와이리의 지침이기도 했다. 골라니는 이라크 내 알카에다가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엄격한 이슬람 계율 강제가 주민들의 반발을 불렀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스라 전선 결성이 발표됐을 때 이라크 내의 이라크이슬람국가도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누스라전선이 결성된 2011년 말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미군 철수 직후부터 시아-수니파 정쟁이 불붙었다. 말리키 정권은 미군 철수 다음날인 12월19일 말리키 정부는 수니파 세력을 대표하는 타리크 알 하시미에 부통령에 대해 정부 요인 암살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미군 철수 나흘 뒤 바그다드 등 이라크 전역에서는 차량폭탄 등에 의한 테러 물결이 일어 최소 63명이 숨졌다. 미군 철수 두달 만에 약 1000여명이 테러와의 전투로 사망했다. 수니파 반군은 미군 철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세를 올렸고, 그 중심에는 이라크이슬람국가가가 있었다.

바그다디는 7월에 첫 육성 성명을 냈다. 그는 자신들이 쫓겨났던 안바르 주등 거점으로 복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라크 교도소에 수감중인 이슬람주의 세력들을 탈옥시키는 ‘담장 파괴’라는 새로운 공세를 펼치겠다고 선언했다. 담장 파괴 공세는 7월21일 미군의 가혹행위로 악명높던 아부그라이브 형무소를 차량폭탄 테러로 공격해, 약 500명 의 주요 이슬람주의 무장대원들을 탈옥시키며 절정에 올랐다. 이 사건은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했다. 그들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탈옥한 이들은 세력을 배가시켰다.

시리아에서 누스라전선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누스라전선 결성이 발표됐을 때 시리아는 홈스 공방전 등을 통해 완전히 내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표적인 반정부 무장세력인 자유시리아군(FSA)은 일관된 지휘체계가 없는 각 조직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반정부 세력 지도자들도 터키 등 외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호텔 참호’에 있는 지도자로 불리웠다. 반면, 누스라전선은 달랐다. 지도자나 대원들은 현장 전투력과 헌신성에서 다른 반정부 세력들을 압도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아사드 정권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 등 과감한 공세는 대부분 누스라전선이 감행했다. 내전 초기 누스라전선은 친서방 세속주의 반정부세력들과 연대를 구축했다. 반군 지역에서 자신들의 엄격한 계율을 강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민들을 위한 사회 서비스 제공에 치중했다. 밀가루 배급을 하는 한편 기독교도들도 공격 목표가 아니라고 밝히며 수니파 이외 주민들 사이에서도 저변을 넓혔다.

누스라전선이 결성된 그해 말 미국은 이 조직이 이라크 내 알카에다의 별칭일뿐이라며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이 조처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시리아 전국에서 주민들은 “시리아에서 유일한 테러 세력은 아사드”라는 구호를 들고 행진했다. 수십개의 반군 조직들은 “우리 모두는 누스라전선이다”라며 옹호했다. 해외 망명중인 친서방 시리아 반정부 정치조직들도 미국의 테러리스트 규정을 비난했다. 2012-2013년 연말연시를 거치며 누스라전선은 동북부의 이들리브, 알레포 등지에서 완전히 거점을 굳혔다. 이때까지도 누스라전선은 알카에다 세력임을 철저히 감추려 했다. 이라크이슬람국가도 시리아 접경 안바르와 니네베 주에서 거점을 회복했다.

시리아의 누스라전선과 이라크이슬람국가의 관계는 2013년 4월13일 바그다디의 육성 성명을 계기로 완전히 새 국면으로 진입했다. 그는 누스라전선이 이라크이슬람국가에서 파생된 조직이며, 이제 두 조직을 다시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바그다디의 발표는 폭탄선언이었다. 골라니는 즉각 이를 부인했다. 중동 내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의 대개편이 막을 올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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