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태국) 선교역사 – 김동학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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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동기(1816-1867)

이후에 계속적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선교부가 조직되기는 하였으나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2) 도약기(1867-1941)

1867년 맥길버리 선교사가 태국 북부 지방인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통해 북부 지방이 크게 복음화 되어갔다. 맥길버리 가족이 치앙마이에 기독교 선교를 위한 전도 기관을 설립하고 월슨 선교사 가족과 연합하여 1868년 4월 18일에 치앙마이에 제 1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885년에는 북쪽 사역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라오스 장로회를 설립하였다. 맥길버리 선교사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 태국 북부 지방의 거의 모든 도에 Mission Station이 설립되었다.Dr. W.A.Briggs의 보고에 의하면 “치앙마이 지역의 교회들이 미얀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한다. 태국선교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는 여러 선교부가 교회를 설립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그 결과 교회들이 많이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장로교가 크게 성장하고 전체적인 교세를 이끌어갔다. 특히 1938년 중국인 부흥사 존홍이 와서 태국 교회의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이끌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께 헌신하였고 다가오는 시련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3) 성장기(1942-현재)

특별히 1970년대부터는 교회성장이 빨라지고 있는데 그 원인은 첫째, 복음이 전파 된지 오래 되었고 여러 가지 좋은 전략적 방법으로 전파되어 태국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와 일상생활에서 증가되는 문제들로 인하여 태국인들이 다른 곳에서 출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 태국 선교를 위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내에서도 특히 부흥하는 지역들이 있는데, 북부 중심도시 치앙마이, 치앙라이, 매홍손을 중심으로 산족 사이에서 부흥의 불길이 강하게 일고 있어 한 마을 단위가 집단으로 개종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치앙마이의 순교자

태국내 첫 개종자들 중 한 명은 치앙마이의 불교학자인 닌 인타(Nin Inta)였다. 그는 개기일식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그의 선교사 친구들이 이것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을 듣고 개기일식이 일어난 것을 본 후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닌 인타의 영접이 다른 태국인 7명의 개종으로 이어지자 치앙마이의 통치자는 행동을 취했다. 일곱 명 중 두 명, 노이 수 야(Noi Su Ya)와 난 차이(Nan Chai)가 체포되었다. 그들이 불교를 버렸다는 것을 자백했을 때 그들의 목에는 멍에가 메어지고 집의 대들보에 매달아졌다. 밤새 고문을 당한 후 그들은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로 다시 개종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니오”라고 그들은 말하고 머리 숙여 기도했다.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정글로 끌려가 맞아 죽었다. 이후 기독교에 적개심을 갖고 있던 통치자는 죽었고 그의 후계자는 덜 가혹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치앙마이 지역의 순교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치앙마이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함과 동시에 순교자 정신을 가지도록 도전하고 있다. 치앙마이의 보이지 않는 이러한 영적인 도전은 하나님과 함께 온 열방에 나가기 원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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