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기독교 선교역사(약사) – 김동학선교사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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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기독교 선교역사(약사) – 김동학선교사 자료제공

태국의 선교역사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그의 아내와 43년 동안 한번의 휴가도 없이 사역하였다. 태국의 선교역사

 

① 1656년: 프랑스 황제 루이16세가 군대와 기술자와 함께 카톨릭 선교사를 파송. 

태국의 ‘나라이’ 국왕이 선교사를 우호적으로 대우

② 1688년: 카톨릭 선교사 콘스탄틴 풀콘의 내란음모 사건으로 카톨릭신자 선교사 투옥.

처형당함. 150년간 쇄국정책

③ 1828년: 개신교 선교사 후레드릭 구츠랍프(독일인. 의사), 톱 링(영국인)이 화란선교협회의

파송으로 태국선교시작. 개신교 선교의 효시.

④ 1878년: 종교관습법이 선포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됨

⑤ 현재 6,500만 인구중 개신교 성도는 10만명 정도의 0.2%에 불과하다. 

전체 선교사수 1,300명, 한국인 선교사수 100여 가정. 

170년의 선교역사를 가졌지만 선교결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임.

 

 

1. 카톨릭의 선교역사

 

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카톨릭이 먼저 시작이 되었으며 개신교보다 273년이나 앞서서 시작되었다. 1511년 카톨릭 사제들은 알부끄에르끄'(Alfonso de Albuquerque)와 그의 대사를 동반하여 태국으로 왔다. 

 

카톨릭의 첫 번째 거주 선교사는 1567년에 도착하였다. 기독교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은 고통스럽게도 느렸다. 275년 후인 1785년 Chari 왕조의 시작 이후에 태국의 역사가 현재의 방콕 기간(Ratanakosin)의 사작을 표시하는 해에, 카톨릭 공동체는 단지 1,372명이었다. 이등 대다수 카톨릭 교인들은 안남(현재의 베트남 일부) 사람들과 태국 사람 및 포루투칼 종족에서 태어난 캄보디아 사람들이었다. 1881년까지 그들의 숫자는 3,000명을 밑돌았으나 1914년까지는 23,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방콕의 중국계 태국 민족 출신이었다. 1972년에는 167,000 카톨릭 교인의 3분의 1이 방콕에 있었다.

 

카톨릭 선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1664년 나라이왕(King Narai)이 프랑스와 국교를 맺고 선교활동을 허락하면서부터였다. 나라이왕은 선교관을 지어주기도 하고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기도 하였으며, 사전과 문법책도 출판하도록 허락하며,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이 곧 신앙적인 수용이라기보다는 서구 문화를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2. 개신교 선교의 시작

 

개신교의 선교는 ‘파나 낭 클라오'(라마3세)왕이 통치 중이었던 Chakri 왕조 설립 후 바로 46년인 1828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태국인에 대한 선교가 Ann Judson의 사역 하에서 1816년에 벌써 시작되었다. 그는 랭구운에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태국 인들을 복음화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828년 8월 23일에는 개신교 선교사로 첫 거주 선교사가 태국에 입국하였다. 개척 선교사는 독일 의사인 Carl Gutzlaff 와 런던 선교회의 영국인 구성원인 Jacob Tomlin이었다.

 

그들의 처음 선교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그들에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외국인 입국을 금지시키자 태국에도 중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그들은 라마 3세 왕의 외무부로부터 방콕에 머물면서 중국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허가를 받았다. 또 그들은 사복음서와 로마서를 태국어로 번역하였으며 1831년에 중국계 태국인 ‘분띠’씨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31년에는 American Bora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소속의 David Abeel 목사가 입국하여 전도지와 약을 나누어주며 선교를 하였고, 최초로 책을 만들어 문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찬양 3 곡을 가르쳐 ‘끼앙 꾸워이 씨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40년에는 ‘째쓰 다쓰웰씽’ 목사와 ‘덴빗 브랏레이’ 목사 겸 의사가 입국하여 선교를 하며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태국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여 많은 태국 사람들에게 치료를 해 주며 수술을 하였다.

 

3. 개신교 선교의 본격화

Monkut 왕

개신교의 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목사이며 의사이며 뛰어난 행정가인 이 ‘덴빗 브랏레이’ 박사에 의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Monkut왕에게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의술을 통하여 친분을 갖고 선교를 준비하였다. 그는 후임왕인 Chulaiongkorn의 영어 교사가 되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그의 아내와 미국 선교 협의회(American Missionary Association) 밑에서 1873년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한번의 휴가도 없이 사역하였다.

 

이 기간에 사역한 선교 단체로는 영국 런던 선교협의회(LMS)와 미국 외국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for Commissions for Foreign Mission)가 1831년에 미국 침례교회 협회(American Baptist Convention)가 1831년에, 그리고 1840년 미국 장로교 선교부(The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사들이다.

 

1833년에 미국 침례교회 선교회 소속 ‘존 테일러 존스’선교사가 입국하였고, 1835년에는 ‘윌리엄 딘’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존스’는 1843년에 신약성경을 태국어로 번역 완료하였고, ‘윌리엄’은 1837년 11명의 성도와 함께 태국 최초의 교회(중국계 태국인)를 세워 ‘마이뜨릿짓 교회’라고 명명하였다. 그 이후 1882년까지 중국계 태국인을 중심으로 6개의 교회와 500여명의 성도로 성장케 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최초의 선교사는 William Buell 부부로써, 1840년에 도착하였다. 장로교인들은 Buell의 도착 이후 19년만에 태국인 가운데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 1859년 첫 번째 태국인인 Choen 씨가 6명의 선교사가 30년 동안 사역에 힘쓴 결과로 세례를 받았다.

 

1847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소속 ‘스데반 매튠’선교사와 ‘사무엘 하우스’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1859년까지 이들의 활동으로 최초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1856년 최초의 태국인 교회인 방콕 제1교회(쌈레교회)를 세웠으며, 제2교회는 1878년에, 제3교회는 1896년에 세워졌다. 제4교회인 ‘씁판타웡교회’는 1904년에 최초 태국인의 힘으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제5교회인 ‘와타나 교회’는 1922년에, 제6교회인 ‘싸턴교회’는 1932년에 제2교회에서 갈라져서 세워졌다.

 

태국 선교에 있어서 1852년부터 1883년까지는 선교의 성장이 느린 투쟁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두 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었는데 이들은 최초의 세례자 이후 1869년 지방 통치자인 ‘챠오 카윌라루트'(Chao Kawilaroot)의 은밀한 명령 하에 몽둥이로 맞고 창에 찔려 죽고 나머지 신자들은 피신하였다.

 

4. 교회의 성장

 

1884년부터 1914년까지는 힘찬 교회성장 운동의 기간으로 1884년 10월 기점으로 하여 태국의 북부지역에서부터 신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867년 McGilvary 선교사가 태국 북부지방인 Chiangmai에 도착하여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통해 북부 지방이 크게 복음화되었고 이 기간에 여러 선교부가 교회를 설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그 결과 교회들이 많이 성장하였다.

 

1884년까지 152명이던 신자의 수가 1894년에는 11교회로 1,841명이 되었고, 1902년에는 2,929명으로 성장하였고, 1914년에는 26교회로 6,934명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남쪽 지역은 이에 비해 성장의 모습이 보다 느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본이 태국을 점령하여 서방세력에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었고, 또 20세기 초 선교에 공헌했던 인물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남으로 태국 선교의 중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초 6,000명이던 신자가 1960년에는 24,539명, 1978년에는 58,953명으로 매년 9%씩 성장하였다. 그 성장 원인으로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활약과 신자들의 각성운동, 특히 영웅적 태국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시타산’ 목사와 ‘풍스노이’ 목사 그리고 ‘통캉’ 목사 등의 활약이 컸으며, 외국 선교 단체들이 대대적으로 입국 활동하였으며 또 선교단체의 초교파적인 연합 활동이 부흥의 원인이었다.

 

5. 요  약

Alex G. Smith 는 태국의 개신교 성장 역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개척의 시대 : 1833년 – 1851년.

2. 구축의 시대 : 1852년 – 1883년.

3. 대 성장의 시대 : 1884년 – 1914년.

4. 성장의 정지 시대 : 1914년 – 1940

5. 핍박과 배교의 시대 : 1941년 – 1945년.

6. 전후 성장의 시대 : 1946년 – 1982년

7. 미래 전망의 시대 : 1982년 – 2000년.

 

특히 2,000년을 기해 태국 교회가 60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으며 현재 4-5명의 선교사를 캄보디아와 싱가폴 그리고 마카오 등지에 파송하여 태국인과 현지 주민을 위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제 태국을 통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선교의 장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6. 교회현지상황

 

태국 목회자들이 한국을 방문 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한국에는 지역 지역마다, 도시나 시골이나 어느 곳을 가든지 교회를 나타내는 십자가가 많은데 태국에는 집집마다 사당이 있고 불상이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태국은 브라만교와 소승불교의 영향으로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 동안 태국 선교는 태국 사회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계급인 천민을 대상으로 하여 선교 활동을 해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태국 교회의 교단이나 교계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계급의 출신이며 태국 교회의 성도들 역시 이 계층의 성도들이다.

 

그래서 태국의 상류층 부류들에게 있어서의 태국 기독교는 돈 있는 외국 교회와 외국 선교사들에게 물질적 후원을 받고 있는 불쌍한 단체로밖에 생각되질 않는다. 

 

태국을 방문하여 전국 어느 곳을 가든지 십자가를 발견하거나 교회당을 발견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그만큼 기독교 인구가 적고, 교회가 적기 때문이다.

 

7. 태국내 기독교 교단

 

현재 태국내에는 세 개의 대표적인 교단이 있고 그 속에 많은 소수 민족들의 교회까지도 표함이 되어 있다. 가장 크고 대표적인 교단은 C.C.T(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태국기독교총회)교단이며 그 다음으로는 E.F.T(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태국 복음주의 연맹), 과 S.B(The Baptist Church Foundation, 태국 남침례교 연맹)이 있다. 그 외에도 안식교와 천주교가 있으며 각기 여러 선교단체를 구성하여 활동하며 교단마다 규모는 작지만 신학교를 운영하여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 1. C.C.T 교단

 

C.C.T 교단은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적극적인 복음사역, 학교, 병원 사역에 태국 인들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0년 ‘존 엘 네비우스'(당시 중국 선교사)의 글의 영향과 함께 ‘로버트 이 씨비아’ 선교사와 ‘아데 제이 브라운’ 선교사가 “태국인의 교회는 태국 인의 힘으로 자립하고 사역도 태국 인의 힘으로”라는 정책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태국 기독교인들이 물질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기 때문에 실패하고 오히려 선교에 혼란만 가져왔다. 1919년 미국 선교부에서 태국 교회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만들게 한 “The Siam Mission”이 오늘날의 C.C.T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1928년 태국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태국 교회가 각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34년 C.C.T 교단을 세워 5개년 계획을 세워 태국 기독교의 부흥을 희망하며 열심히 사역하였으나 1938년 오히려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자 쇠퇴하였다.

 

1938년에 다시 신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중국인 부흥사 ‘송요한’목사를 초청하여 태국 전국적인 부흥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이 일로 많은 태국 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교단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1951년 태국 정부에서는 C.C.T 교단을 공식적인 종교단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들에게 속한 모든 재산을 정부에서 교단에 이양해 줌으로 본격적인 교단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 교단은 외국 선교부에서 지원받은 학교 병원 등 많은 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교단의 전체 450여명 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교단에서 지급하고 있다.

 

– 2. E.F.T 교단

 

E.F.T 교단은 1956년 C.C.T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서로 도와주고 대 정부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C.C.T 교단의 목회, 선교, 정책등에 불만을 품은 일부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분리시켜 세운 또 다른 교단이며, 찬양과 성령을 강조하고 ‘복음’을 강조하는 교단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 3. 침례교단

 

침례교단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 The Southern Baptists 교단에 속한 E.D. Calloway 선교사가 1949년에 태국에 입국하여 중국계 태국 인을 상대로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 침례교단의 시작이 되었다.

 

1951년 방콕침례교회, 1952년에 방콕 침례교단 신학교를 세우며 교회를 세우고 이 외에도 1952년에 아유타야에 54년에는 촌부리에 59년에는 쁘라찐부리 지역등에 교회를 세웠고, 1971년에는 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모든 침례교단 소속 외국 선교사들이 하나로 뭉쳐 오늘날의 태국 침례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8. 태국의 교회들 

 

태국에는 모든 교회를 통 털어서 1.700개처로 보는데 그 중에도 80%는 미자립 상태이며 교역자도 변변치 않고 그나마 교역자가 있지도 않은 곳이 태반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거의 교회가 미자립 교회이다 보니 교회가 힘이 없고 목회자들도 목회에 힘을 내지 못하고 목회자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실정으로 간신히 이름만 유지시키는 교회들이 많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도시의 교회에서 교세가 크고 성도들도 많으며 경제적으로도 든든한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어렵고, 가난하고, 힘든 상태에 있다.

 

태국 국민들은 경제적인 부나 정치적인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 또는 인정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교와 또는 왕실과 관련이 있고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은 중·하류층 이하의 위치로 가난하고 힘도 없고 신분적으로도 자신들이 하류에 속한다고 인정을 하는 정도이다.

 

전체 인구에서 볼 때 기독교도들은 당연히 하층 계급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목회자들까지도 일반 시민들 앞에서 위축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관공서 직원들이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함을 나타내지 못한다.

 

9. 태국교회의 과제

 

태국 교회의 역사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결코 짧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태국교회의 상황은 매우 힘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이 그 표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살피면서 그 해결의 방법론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이 된다.

 

– 첫번째. 신학교육의 부재

 

첫째 신학교육의 부재가 그 문제이며 해결을 위해서는 신학교운영과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처음에 종교적인 문제부터 다시 언급을 해야만 한다. 개 교회에 신학생들이 부족하고, 신학교에 신학생이 부족하고, 신학교에 교수들이 부족하고 , 교수들이 있다 해도 그들의 질적인 실력이 뒷받침이 되지 못하니 꼬리에 꼬리를 문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거의 절대적인 불교 국가이다 보니 한 집안에서 개신교 신자가 나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집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는 식구가 생기면 그는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생활의 보호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그가 생업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다니며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신학생, 목회자들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연히 신학교가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

 

태국에서는 승려는 대우를 받고 그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지만, 목회자는 대우를 받거나 우선권이 주어지질 않는다. 직업적인 면에서 볼 때도 선택의 가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생업을 유지하는 직업의 종류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없고, 종교적인 면에서 괄시를 받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정승회 선교사는 태국에 성경학교 수준의 신학교들이 20개처가 있으나 그 중에는 학생들의 숫자가 100명을 상회하는 경우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그 아래 수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99년 현재 태국 사명자성회 준비위원들이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태국에는 성경학교를 포함한 신학교의 숫자가 32개로 집계되고 있으면 전체 신학생들의 숫자도 400여명에 이른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 중에 C.C.T 교단의 신학교가 3개교, E.F.T 교단의 신학교가 22개교, 침례교단 신학교가 1개교 그리고 무교단 신학교가 6개에 이른다고 집계되고 있다.

 

신학교의 교수 수준도 그렇게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되고 정식 대학교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 외 대부분의 학교 교수들은 일반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생들도 가난하고 힘이 없으며 투철한 사명의 의식 속에서 신학을 지원하여 공부한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손에서 연결되어 타의에 의하여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중에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공부하며 준비하는 학생들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신학교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류계층(80% 이상이 산족 소수민족들임)의 사람들이며, 태국 신학생 전원이 학비와 생활비까지도 외국 선교사에 의존하여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해도 대부분 생활비가 보장되지 못하며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목회자가 고용인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이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 학교나 병원등 생활비가 보장되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태국 교단의 지도자들과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지금도 매년 수많은 집회 및 세미나가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열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태국 교회의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 진정 태국 영혼들과 태국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전도해야할 대상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자세가 정말로 필요하다. 바른 사명을 심어주고 그 사명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정책이나 사역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고, 그 복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며 확신과 사명을 심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조심스럽게 제안을 한다면. 한국에는 미국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에 돌아와서 신학대학 교수의 꿈을 가지고 돌아온 학자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다 정교수의 위치에서 강의를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일부에서는 한국에는 신학교 교수들이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실력 있는 학자들이 강의할 자리가 없어서 시간 강사로 만족을 하며 이 학교 저 학교를 땀흘리며 달리고 있는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면, 이제부터는 그 선배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나와 헌신하는 일꾼들을 양육할 수 있는 교수 요원 선교사가 재 파송되어 선교지의 신학교의 질을 높이고, 목회자들의 질을 높이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 두 번째. 목회자

 

두 번째는 목회자들의 질을 높이고 사명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태국 교회의 신학교의 상태 속에서는 질 좋은 목회자를 기대할 수 없고, 실력 있는 목회자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교회의 성장이라는 말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태국의 목회자들과 계속적으로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목회에 애착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목회하며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상황이 목회자가 애착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명의 의식도 부족하거니와 사명을 가지고 일 할만한 사역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 사역 및 대부분의 목회에 있어서 한국 교회와 같은 책임 있는 목회를 행하지 못하며, 정상적인 목회를 통하여 성도들을 살피거나 교회를 살피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특히 평일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태국의 성도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목회자의 가정은 목회자 자신과 사모와 전 가족이 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역하는 모습이 없든지 아니면 약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교회가 그 목회자의 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태국의 목회자들에게 외국의 선교사나 특히 한국의 목회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재정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선교지의 교회를 향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많이 하기 때문에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국 목회자만을 위한 전문 중계인 들까지 생길 정도이다. 

 

태국 선교지에서 근 20여년을 선교 사역에 수고한 한 선교사의 고백이다.

 

선교를 시작한 초기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여대생이 그를 찾아 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제안을 하였다. “내가 사람을 모아다 주면 얼마를 주겠느냐?” 이는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을 모아다 주면 의례적으로 사례를 하였던 것을 직접 보여주는 예였다.

 

이뿐이 아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회자들이 선교의 현장인 태국에 와서는 대형 집회를 열게 되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모아서 ‘맘모스’ 집회를 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 집회를 운영하는데는 작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이상 들어가는 집회도 있는데, 그런 집회에서 태국의 목회자들이 인원을 동원한 대가로 큰 수입을 올리는 수가 있다는 태국 목회자들의 고백이 있기도 하다.

 

이는 태국 목회자들을 질적으로 떨어뜨리는 결과이며, 태국뿐 아니라 모든 선교지의 선교를 방해하고, 수고하는 선교사들의 사역에 역행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작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움집한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것보다는 그들의 민족, 그들의 교회의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바로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며 눈물로 그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현지의 목회자들의 영적 충전과 영적 무장을 위하여 지원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정승회 선교사는 태국인 선교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교회 개척을 주 사역으로 활동하기에 다른 선교 사역 분야에는 별 관심이 없으나 교회 개척과 육성 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교역자의 재교육과 훈련의 절실함을 느꼈다”.

 

선교 현지의 현지 인들은 그들의 민족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 단지 선교의 후원자인 우리들과 선교사들은 그 선교현장의 현지인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바로 세우고, 준비시키고 무장시키는 일에 힘쓰는 것이 좋은 선교의 방법이 될 것이다.

 

태국의 170여 년이라는 개신교 선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도 대부분이 도시중심의 중국인들과 소외된 지역의 소수 산족들을 빼고 나면 순수한 태국 인들의 선교 열매는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는 태국의 불교가 전체 태국 인들의 정신과 육체적인 삶 속에 너무 강하게 그리고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마저도 불교도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많으며 심지어는 혼합종교인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주관적인 견해인지는 모르지만 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담대하게 그리고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들이 함께 나타날 때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태국의 목회자들은 말씀에 대한 확신도 부족하고, 그러니 자신 있게 담대하게 전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이유 때문에 태국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태국을 선교하기 위해서 많은 물질과 시간과 인력을 투자했던 외국의 선교부들이 서서히 태국에서 선교의 일들을 포기하고 떠나가고 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인즉 “불교국가인 태국에서는 더 이상 선교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오순절계통의 유럽 선교사들이 떠나갔다. 그리고 미국 선교부들이 철수하고 있으며, 한국 선교사들 역시 4년에서 5년 사역을 한 뒤에는 많은 수가 다른 나라로 선교지를 옮기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태국 교회의 현실을 볼 때 지금이야말로 태국 교회가 외국 선교사들과 외국 교회와 외국 목회자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왜냐 하면 복음 안에서 사명을 가지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에 주변 다른 불교국가와  동남아시아의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신학교의 질적 양적 문제, 교수의 문제, 그리고 목회자들의 영적인 문제 등을 위해서 지금이야말로 선교적인 집중적 후원과 지도가 펼쳐져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 세 번째. 태국교회의 영적인 상황

 

다른 하나는 태국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개인적인 영적인 생활이라는 단어는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태국 인들의 종교성 속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덕을 쌓고 베푸는 것에 대해 익숙해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생활도 그런 종류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며 봉사하게 된다. 영적인 은사를 개발하거나, 힘있게 기도하거나, 능력 있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기에, 체험이 없으니 역사가 증거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와 능력이 함께 나타나서 증거될 때 복음이 증거 되고 부흥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런 영적인 역사가 부족하기에 태국교회의 선교 역사에 비해 그 열매나 결과가 안타까울 정도로 약한 것이다.

 

태국 선교를 위해서 지금도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선교를 위해서 수십 수백 개의 선교 단체가 머물러 있고 활동 중에 있다. 태국 선교를 위해서 정말로 힘써 기도해야 할 것이 바로 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올바른 신앙과 질적인 향상을 위해 그리고 성경말씀에 익숙한 신실한 지도자들이 양육되고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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