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밑의 이 글은 작년 4월, 제가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 마을 산헤로니미또에 있던 신학교를 떠난지 근 16년만에 처음 다시 방문해 일주일 동안 집중 수업을 인도한 후 돌아와 쓰고자 했던 글이였지만 그동안 사역의 바쁨이라는 핑계로 미루어 놓았던 글입니다. 그러나 올 초 사랑하는 형제요 친구 Cupertino Mayo 교수님이 보내준 옛사진을 받은 후 더 이상은 미루면 않되겠다는 빛진 심정으로 두서없이 길게 글적거리게 된 글입니다.
16년만의 귀향(?)의 기쁨…1998년 객원교수로 두학기를 가르쳤던 신학교가 있던 멕시코 Guerrero 주의 Jeronimito… 아름다웠던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San Jeronimito를 떠난지 거의 16년만인 지난 2014년 4월, 나는 처음으로 그 마을을 다시 찾았다.
대부분의 마을 도로가 흙길이였고 유일하게 아스팔트 신작로가 하나였던 작은 마을… 인터넷은 고사하고 장거리 전화 조차 마음대로 걸 수 없던 작은 마을… 약 30명 정도의 학생이 전부였던 신학교…
그러나 16년이 지난 후, 과테말라에서 멕시코 국경을 넘어 거의 36시간의 버스 여행 끝에 도착한 San Jeronimito 마을은 대부분의 도로가 아스팔트로 깔려있고, 새건물들도 제법 있는, 깨끗한 소도시로 탈바꿈했고 신학교 역시 이제 150명 정도의 멕시코 전체에서 두번째 큰 침례교 신학교로 성장했다. 물론 대부분의 교수진들과 학생들은 바뀌어졌고, 나이 많던 대부분의 이웃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이사를 갔지만, 그러나 지난 17년동안 계속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연락을 해왔던 Cupertino Mayo 학감님과 Omar Bustos 학장님 가족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버스 터미날로 나를 마중나온 사람은 옛친구 Cupertino 학감님이였다. 약 10년 전 텍사스를 방문 했을때 가졌던 짧은 만남 후 참으로 오랫만인 해후에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신학교에 도착해 내가일주일 묵을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갈때 또 다른 반가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반가움은 게스트 하우스 입구 계단에 작은 조약돌로 새겨진 영어와 한국어… “Welcome” 그리고 “어서 오세요” 인사말이였는데… 산 헤로니미또를 떠난 후 16년 만에 다시 보는 그 조약돌 환영 문구를 보면서 갑자기 16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당시 미국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아내가 나와 멕시코행을 함께 할 수 없어 한학기 떨어져 생활하다 마침내 여름 방학이 되, 아내가 한살 반 된 한솔이를 데리고 San Jeronimito로 오기로 예정된 몇 주 전, Cupertino 교수님은 나에게 작은 쪽지를 가져와 뜬금없이 혹시 Bienvenido란 단어를 영어와 한국어로는 어떻게 쓰는지 적어 달라고 했었다. 아마도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서겠지 하고 특별한 생각없이 영어 “welcome” 한국어 “어서오세요” 를(사실 “환영합니다”라고 해야했지만…^^) 쪽지에 적어 주었는데… 실은 내 가족의 산 헤로니미또 입성을 축해해주기 위해, 계획되었던 게스트 하우스 입구 공사를 미루고, 아내와 한솔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입구 계단에 조약돌로 한글과 영어 인사를 새겨 넣어주었던 Cupertino 형제의 따뜻함이 새롭게 다시 기억되었다.
강의는 예정대로 월요일 오전 7시부터 시작되었고… 수요일 신학교 정기 채플 시간에 기타 반주에 맞춰 스페인풍 복음성가를 열정적으로 부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내가 설교하기 전 학생들에게 17년전의 잔잔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나를 소개해주는 꾸뻬르띠노 학감님의 조금은 들뜬 환영사와…언제나 한결같은 젠틀맨 Omar Bustos 학장님의 부드러운, 바리톤 저음이지만 진솔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치 17년 전 객원교수로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taco와 enchilada를 먹으며, 해변가에 가 게를 잡으며, 전도 여행을 함께 하며, 삶을 나누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네째 날 강의를 마친 후, 16년 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던 Cupertino 교수의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음악교수이기도한 Felipita 사모님은 반가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큰 목소리로… 또 환한 미소로 “Hermano!” 소리치며 따뜻한 abrazo ( 포옹)로 나를 맞아주었고 곧 내가 좋아하는 생선요리가 차려진 저녁 테이블로 안내해주셨다.
그러나 16년의 세월을 돌려 놓은 것 같은 해후에는 반가움과 아픔… 그리고 기쁨과 잔잔한 슬픔이 함께 있었다.
당시 우리 한솔이보다 3살 위 였던 꾸뻬르띠노 교수의 아들 Joelito는 공부를 열심히 해, 그곳서 네시간쯤 떨어진 Acapulco 란 도시의 의과대학에 진학해 부모님들에게 기쁨을 선사했고, 나를 만나러 집에 오고자 했지만, 장학금을 받는 ROTC 훈련때문에 집에 올 수 없게 되었다.
착하디 착했던 큰 딸 Xaris… 당시 10살 남짓한 초등학교 소녀였지만 신학교에서 사역하시는 엄마를 도와 가사를 돌보고 동생 joelito와 당시 아주 어렸던 우리 한솔이를 마치 큰누나처럼 데리고 놀던… 어리고 말이 없었지만 성숙했던 Xaris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용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쫓아 먼 도회지로 갔다가, 그곳서 만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싱글 맘으로 인근 도시의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들 안드레를 데리고 인사하러 왔다.
또한 16년의 세월은 Felipita 사모님의 건강을 많이 상하게 하였다.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악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청각으로만 가르치는 일을 간신히 하고 있었고, 두 달에 한번씩 9시간 떨어진 과달라하라 (멕시코 제 2의 도시) 에 검진 겸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워락 검진비와 치료비가 비싸 자주 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커피와 후식을 먹고 있을때 Felipita 사모님은 깨끗한 보자기에서 여자 원피스와 귀걸이 한 세트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이번에 함께 오지못한 나의 아내에게 주고자 마련한 선물이었다. Hermana (내 아내를 지칭함) 가 왔었으면 정말 좋았겠다고 아쉬어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담긴 이 선물을 꼭 전해달라며 나에게 건네 준 선물들… 비록 값비싼 물건들은 아니지만, 이들의 생활을 잘 알기에 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분들이 어떠한 큰 결심을 했어야 했는지, 얼마나 이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인지 나는 잘 알기에 이 선물을 정말 받아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교차되는 감정으로 그 선물을 받아 들고 아무 말 없이 물끄럼이 앉아 있을때, Hermana Felipita는 아까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한 마디를 던졌다. 평소에 말이 없던 Hermana Felipita의 한 마디 말에는 잔잔하지만눈물겨운 애정과 아픔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Hermano Choe, sabes que estoy perdiendo mi vista del ojo. Me alegro mucho que Ud. pudo vsitarnos, antes de que pierda mi vista. (형제님, 형제님은 내가 지금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러나 내가 아직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내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 형제님이 우리를 방문해 주셔서 너무 기뻐고 감사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Hermana Felipita의 말은 큰 울림으로 내 가슴에 다가왔고 나는 갑자기 먹먹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찾은 이곳 산 헤로니미또 마을은 다름아닌, 이곳을 떠난 후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그리고 나도 그들을 결코 잊지 못했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Daniel Nam Y. Choe, Ph.D.
Profesor de Historia y Mision
Seminario Teologico Centroamericano (SET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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