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계 유 일 의 힌 두 교 왕 국, 네 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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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계 유 일 의 힌 두 교 왕 국, 네 팔 ! (허인석선교사의 글 2008년 6월 13일)

중앙 아시아에 히말라야 산맥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인도, 그리고 북으로는 중국
을 경계로 하고 있는 산지의 나라입니다. 면적은 한반도의 2/3 크기이나 대부분의 국토가 만년설(萬年雪)과 정글로 덮혀있어서, 경작지는 불과 16%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구는 2,300만명 정도로 몽고 티벳계(40%, 우리의 얼굴 모습과 똑같음)와 인도 아리아계 인종이 주류를 이루며, 100여 종류의 소수(小數) 종족(각각 다른 언어와 문화)들이 있습니다. 또한 네팔에는 인도, 부탄 및 티벳 등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기후는 인도를 접한 지역의 열대로부터 고산 지역의 냉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120만 인구의 수도 카투만두(해발 1,331m)는 4계절이 있으나, 여름에는 덥지 않고(30℃ 이하)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습니다. -밤에는 0℃ 가까이 떨어짐- 한편 6월부터 9월에 걸친 우기(雨期)와 그 외의 건기(乾期)로 특징지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건기에는 청명한 날씨 속에 눈덮힌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듭니다.

네팔은 힌두교 왕국으로 왕도 힌두교의 神 중의 하나인 ‘비스누의 化身’이라 신봉되어집니다. 왕은 백성들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우민(愚民)정책을 쓰며, 또한 힌두교의 엄한 계급 제도인 ‘카스트’에 의하여 사회는 극도로 침체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1990년 ‘네팔사태’가 일어난 후 민주화가 추진되고 있으며, 따라서 왕은 차츰 상징적인 위치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성향이 깊은 젊은 계층 속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 왕을 지지하는 왕정파 등에 의해 정권이 자주 바뀌는 등 여전히 불안한 상태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10대 빈국 중의 하나로서 -국민소득 $200 정도- 우리 나라 60년대의 경제 수준입니다. 주요 산업은 농업(94%)이며 공업은 극히 미약하여 카페트를 만드는 가내 수공업이 발달된 정도입니다. 자금 부족과 도로 사정 그리고 후진 기술 등으로 경제의 낙후를 면치 못하여, 오히려 관광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문맹율은 80%이상으로 교육수준 또한 아주 저조합니다. 언어는 네팔어가 공용어이나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학교도 많습니다. 의료시설 또한 태부족하며 사람들은 의사보다는 종교적인 치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결과 공중 보건의식이 결여되어 질병이 아주 많으며, 평균수명은 49세(인구의 42%가 15세 이하) 밖에 되지 않습니다.

힌두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또한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5천 년에 걸쳐 인도 지역의 종교와 문화가 혼합하며 점차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힌두교는 창시자가 없습니다. 2천년 이상 걸려 쓰여졌다는 방대한 경전 속에는 힌두교가 거쳐온 여러 시대의 종교적 관행과 예배 의식, 그리고 교리들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신화와 민담(民譚), 주술 등까지 포함되어 힌두교의 교리를 뚜렷이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힌두교의 신은 3억 8천’이란 말이 있듯이 그들은 범(汎)신론자들입니다. 힌두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그 영혼이 불멸하며 끝없는 윤회(Samsara) 속에서 존재하는데, 전생의 업보(Karma)에 따라 다른 존재 형태로 계속 옮겨간다고 합니다. 따라서 힌두교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이 업보의 굴레로부터 인간의 영혼이 해방이 되는, 즉 해탈(解脫: Moksha)을 말합니다. 해탈의 방법은 현상의 세계(환상: Maya) 속에서 우주의 본질과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깨우치거나 (사색과 명상을 통해), 신에 대한 진실한 헌신, 선한 업보를 열심히 쌓는 길 등을 말합니다. -힌두교는 불교의 근원지임- 이러한 힌두교는 오늘날 네팔 국민의 도덕과 윤리관을 지배하며, 그리고 가난하면서도 종교적 열심에 빠져 살게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7억이 넘는 힌두교는(회교는 10억) 그 형태가 비록 원시 종교처럼 보이나 오늘날 서구에서 번지고 있는 뉴-에이지 등의 사상적 발상이 되기도 합니다.

은둔의 나라로도 알려졌던 네팔이 그 문호를 연 때는 1951년, 그러나 힌두교의 수호를 위해 여전히 폐쇄적이었습니다. 특히 선교사들에게는 입국을 허락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네팔을 접한 인도 국경에서, 그리고 사회 개발 사업(의료, 국토개발, 전문기술 진흥등)의 조건으로 입국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활동은 은밀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는 가운데 만일 선교활동을 하다가 발각되면 즉시 출국을 당하며, 내국인은 전도하거나 가르치다가 경찰에 붙들리면 2년 내지 6년의 징역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힌두교인이며, 개종은 법으로도 금지되었던 네팔! 이렇듯 많은 기독교인들을 감옥에 가두며 박해를 하던 세계에서 유일한 힌두교 왕국입니다. 그러나 1990년 2월 ‘네팔사태’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고 감옥에 갖혔던 기독교인들이 풀려났습니다, 최근 기독교가 3.0%까지 이르는 등 네팔의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히말라야 산골짜기까지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현재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네팔의 교회들은 거의 가정 교회 규모이며, 목회자들은 대부분 평신도 출신으로 신학적 배경이 없어, 교회 성장과 교인들의 바른 신앙에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선교사들은 신학교 사역, 목회자를 위한 연수와 훈련, 제자화 사역, 그리고 교회 개척과 지속적인 보살핌 등을 통하여 네팔 교회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고아원 사역, 교육 사업, 농업을 통한 지역 개발사업, 그리고 의료 사역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생활 환경과 비자 문제 등으로 선교사가 활동하기에는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티벳, 부탄, 그리고 인도의 북부 지역을 선교하는데도 네팔은 그 거점이 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속 ‘네팔’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히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네팔교회의 역사
네팔교회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독특하며 그 역사 또한 매우 짧다. 네팔은 1950-51년 사이에 있었던 혁명 이후에야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하여 그 문호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박해를 피하여 다즐링(네팔 국경에 접한 인도 동북부 지역)에 이주해 갔던 네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네팔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하여 왔다. 따라서 오늘날 네팔교회들은 강한 힌두교 사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하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가 네팔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7, 18세기에 인도로부터 티벳에 들어가려는 제수잇파(Jesuits)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당시 네팔 기독교인은 티벳에 살고 있는 상인들 몇몇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네팔선교는 1715년에 들어왔던 두 명의 수도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당시 네팔은 아직도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는데 이 수도사들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카투만두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시술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들은 외국인 첩보원으로 의심을 받아 1722년 카투만두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으며 1731년까지 박타풀에 머물러 있다가 결국 1734년, 선교를 포기하고 네팔을 떠났다. 그후 1737년 카트만두왕국과 박타풀왕국의 두 왕은 그들을 다시 불러들여 -‘양심의 자유 헌장’(Decree of liberty of conscience)이라는 명분으로- 선교의 기회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1769년 고르카왕(Prithvi Narayan Shah)은 카트만두왕국, 박타풀왕국 그리고 파탄왕국을 통일하고 ‘고르카왕국’을 세웠으며 왕은 기독교인들을 가두며 죽이는 등 심한 박해를 하였다. 그리고 1950년까지 약 200년 동안 네팔은 철저하게 외국인과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문호를 닫게 되었다.
한편 1800년 초에 인도에 사는 영국인들이 인도 북동부 다즐링 지역으로 차(茶) 생산을 위하여 이주하여 갈 때, 그들은 기독교 선교사들과 목사들을 앞세웠다. 또한 많은 네팔인들도 일거리를 찾아 다즐링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래서 이곳의 네팔인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성경이 최초로 번역된 것도 1850년과 1852년 사이 이들 영국인 목사와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이 책들은 10년후 다시 수정되어 재출판되었고 성경번역작업은 계속되어 1915년에 비로소 전(全) 성경이 네팔어로 출간되었다.
이와같이 네팔은 오랫동안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하여 문호를 열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은 네팔과 인접한 인도 북구 국경지역에서 일하며 복음과 함께 네팔에 들어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국경선교회(Nepal Border Fellowship)’도 이 때(1935년)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네팔을 향해 기도로 복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러한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네팔이 외국인에 대하여 그 문호를 열게 되었다. 특히 100여년 동안 강권통치를 해왔던 ‘라나’왕족이 드디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쇄국정책으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경제적인 피폐로 말미암아 국민들은 왕가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일부 지도자(네팔 의회주의파: Nepal Congress)들은 혁명세력을 키우며 네팔과 인도지역에서부터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은 인도에 망명중인 트리브반 왕족의 지지를 받아 국경선으로부터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결국 1951년 2월 트리부반 왕이 인도로부터 돌아와 새 정부를 세움으로 인하여 ‘라나’왕가(王家)는 종식되었다.
이러한 혁명 이후 새 정부는 문호를 개방하였다. 인도에 피신한 네팔 기독교인들은 본국으로 돌아왔고 외국인들과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타인에게 전파할 수 없었다. 정부는 이 들 선교사들에게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는 각종 개발사업만을 요구할 뿐 일체의 정치활동이나 기독교로의 개종을 위한 선교활동등은 법으로 규제하였다. 힌두교를 국가종교로 보호하는데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부 카톨릭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웠고 (1951년에 ‘고다와리’ 고등학교가, 1954년에는 ‘성 사비에르’ 학교가 제수잇파에 의하여 , 그리고 1955년에 ‘성 마리아’ 학교가 로마카톨릭에 의해), 개신교 선교사들은 병원건립과 함께 의료활동 등을 추진하면서 선교단체들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NEB’(Nepal Evangelistic Band 나중에 ‘INF’: International Nepal Fellowship으로 개명)’는 포카라에 ‘Shining Hospital’을 세웠고(1953년), ‘UMN’(United Mission to Nepal)이 1954년에 조직되어 카트만두와 탄센에 의료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네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네팔의 최초의 교회는 인도에서 예수를 믿고 들어 온 ‘부디 사가’에 의하여 포카라에 세워졌으며 카트만두에는 1962년에 비로소 최초의 교회가 생겼다. 전도와 개종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졌다. 강한 힌두교 사회는 이 들을 때리고 추방하며 갖은 핍박을 가했고 정부는 또한 이들을 온갖 위협을 주며 감옥에 가두었다. 특히 트리브반 왕위를 이어받은 마헨드라 왕은 네팔을 ‘한 정당, 한 종교’의 국가개념으로 다스리기 위해 신헌법을 만들어 기독교의 전파를 강력하게 막았다. 이러한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교회와 교인의 수는 꾸준히 늘었다. 1960년대에 이미 여러 개의 선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곳곳에서 생겨났으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성경번역선교회’(WBT), ‘YFC’(Youth for Christ), ‘OM’ 등이 이 때부터 이미 사역을 시작하였다. 1959년에 탄생한 ‘네팔기독교협의회’(NCF: Nepal Christian Fellowship)는 차츰 교회의 수를 늘리며 현지인 기독교 조직체로서 계속 성장하였다.
네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또 한번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90년에 있었던 ‘네팔사태’이다. 1972년에 뒤를 이은 비렌드라 왕정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지식인들의 반정부 민주화운동으로 어려운 국면을 맞다가 1990년 4월에 유혈사태를 끝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새 헌법에 의하여 국왕은 정치권 밖으로 물러나고 다수정당에 의한 ‘의헌 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있던 수많은 기독교인을 풀어주며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히말라야 골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은 1.0%에 이르게 되었고 교회도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들의 공공집회가 열리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들이 활발하게 사역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을 위하여 더욱 끊임없는 기도가 요청된다. 그것은 네팔의 선교적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째로 강한 힌두교 사회는 여전히 기독교의 선교를 대항하고 있다. 지금도 네팔 이곳 저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몰매와 돌던짐’을 당하며 전도와 집회를 방해받고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개인은 온갖 불이익을 당하여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추방을 당한다. 둘째로 ‘개종을 금지’하는 헌법의 조항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위정자(爲政者)들은 집권세력의 성격에 따라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 또다시 기독교인들을 가두며 박해할지 알 수 없다. 사탄은 ‘권세잡은 자’들을 다스리며 권세잡은 자들은 힌두교를 통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셋째로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을 제한하는 것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정부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활동을 배제한 사회개발사업만을 요구하며 선교사들을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선교사를 추방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다. 결국 선교는 끊임없는 ‘영적전쟁’이다.

힌두교에 대한 이해

힌두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또한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5천 년의 세월에 걸쳐 인도 지역의 종교와 문화가 섞이며 점차 발달된 혼합(混合) 종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힌두교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해 내기란 아주 어렵다.

가. 창시자(者): 특정한 창시자가 없음.

나. 경전(經典): 베다, 우파니샤드,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바가바드 등.
2천 년 이상 걸려 쓰여졌다는 방대한 경전 속에는 힌두교가 거쳐온 여러 시대에 유행하였던 종교적 관행(慣行)과 예배의식, 그리고 교리들이 집대성 되었다. 심지어 신화(神話)와 민담(民譚), 주술 등까지 포함이 되어 힌두교의 교리(敎理)를 뚜렷이 말하기 조차 어렵다.

다. 힌두교의 신(神):
*브라만(Brahman)- 온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實體)라고 믿는 영원한 ‘삼위 일체의 신’으로서 이 브라만을 이루는 삼위(三位)는 창조자 브라마(Brahma), 보존자 비시뉴우, 그리고 파괴자 쉬바이다.

이 외에도 숭배되는 신들이 아주 다양하며, 어떤 사람은 그 신의 수가 3억 8천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힌두교도들은 범(汎)신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종파의 수(數)도 신의 대상에 따라 아주 많다.

라. 힌두교의 가르침:
1) 마야(Maya)- 현상(現像)의 세계. 온 우주를 통틀어 유일한 실체는 브라만뿐이며 인간도 이 브라만에 종속되어 있는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독립적인 자아란 환상에 불과하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은 수많은 자기 훈련과 고행 그리고 명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2) 인과 응보(Karma)- 힌두교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그 영혼이불멸(不滅)하며끝없는 윤회(Samsara) 속에서 존재하는데, 전생(前生)의 업보(Karma)에 따라 다른 존재 형태로 계속 옮겨 간다고 한다.

3) 열반(Nirvana)- 인간의 영혼이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되면 도달한다는 궁극적인안락의 상태를 가리킨다.

4) 해탈(Moksha)- 따라서 힌두교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이 업보(業報)의 굴레로부터 인간의 영혼이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마. 힌두교에서 구원의 방법:
1) 지식의길- 현상(現像)의 세계(환상, Maya) 속에서 우주의 본질과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사색과 명상을 통해 깨우침.
2) 헌신의 길- 신에 대한 진실한 헌신을 함으로.
3) 업보를 쌓는 길- 선(善)한 업보를 열심히 쌓는 길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

바. 네팔의 힌두교
네팔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힌두교인이며, 1990년 ‘네팔 사태’가 일어나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法으로도 개종(改宗)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나 사회 그리고 모든 생활의 체계가 모두 힌두교의 지배하(下)에 있다. 국가 종교인 힌두교(90%) 외에도, 불교(8%), 회교(2%) 등이 있으며 기독교는 1.0%에 불과하다. 석가모니가 태어났던 곳이 바로 네팔(룸비니 – 남부 지역에 위치)이며, 불교의 근원(根源)도 역시 힌두교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오늘날 네팔 국민의 도덕과 윤리관(倫理觀), 그리고 가난하면서도 종교적인 열심에 빠져 사는 모든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종교적인 축제가 많으며, 대부분의 축제는 국가적인 명절로 지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7억이 넘는 힌두교는 (회교: 10억 -이슬람교 또는 무슬림) 그 형태가 비록 원시(原始)종교 처럼 보이나 오늘날 서구(西歐)에서 유행하는 뉴-에이지(New Age) 등의 사상적 발상(發想)이 되기도 한다.

* 용어(用語)의 이해
아트만(Atman) – 진정한 자아(自我), 또는 영원하며 온 우주에 편만한 생명의 원리(原理).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 ‘성스러운 신에 대한 송가(頌歌)’라는 뜻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힌두교의 경전(經典). 내용은 전사(戰士) 아류나와 크리슈나 신 사이에 오고 간 철학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음.
브라마(Brahma) – 창조의 신, 브라마와 쉬바와 비시뉴우로 구성된 힌두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들 중에서 제 1 위(位)에 해당하는 신.
브라만(Brahman) – 궁극적 실체(實體), 온 우주의 초월자(超越者).
브라민(Brahmin) – 브라만이라고도 함. 카스트 계급 중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계층인 승려 계급에 속하는 사람.
다르마(Dharma) – 덕행(德行)과 종교적 원리(原理)에 대한 가르침.
가네사(Ganesa) – 지혜와 명철의 신. 보통 코키리 머리를 가진 키가 작은 홍인(紅人)종 남자로 표시함.
하누만(Hanuman) – 원숭이의 신이자 바람의 신. 그는 전쟁에서 라마를 도와 준 적이 있다함.
카르마(Karma, 업보) –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행한 행동 모두가 평가된 가치(價値). 이것에 따라 환생(還生)할 때의 지위(地位)와 모습이 결정됨.
크리슈나(Krishna) – 가장 광(廣)범위 하게 숭배되는 비시뉴우 신의 여덟번째 화신(化身).
라크슈미(Lakshmi) – 아름다움과 부(富)의 여신(女神). 크리슈나의 내연(內緣)의 처(妻).
마하바라타(Mahabharata) – 인도 민족 서사시(敍事詩) 중의 하나. 이 속에 그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가 수록되었음.
마야(Maya) – 힌두교도들이 현상(現像)의 세계를 일컫는 말.
모크샤(Moksha, 해탈) – 무한(無限)한 윤회(輪廻)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함.
삼사라(Samsara, 윤회) – 한 영혼이 해탈(解脫)하기 전까지 겪어야 하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생(再生)의 주기적인 반복. 새로 태어날 때마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존재 형태가 달라진다함.
우파니샤드(Upanidhads) – 궁극적인 실체(實體)와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사변(思辨)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힌두교의 경전(經典).
베다(Veda) –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교의 경전(經典).
비시뉴우(Vishnu) – 본존과 유지의 신. 힌두교의 삼위일체의 신 중에서 제 2 위에 해당.
요가(Yoga) – 신과 합일(合一)되기 위한 힌두교의 훈련 방법. 모든 심(心),신(身),영(靈)적 훈련이 포함됨.

* 10/40 창의 선교전략에 따른 네팔 선교의 중요성에 관한 제고(諸考) *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未)전도 족속들은 10/40 창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0/40 창’(10/40 Window)이라함은 북위 10도에서 북위 40도의 사각형 -아프리카와 아시아만 해당- 안에 들어가는 지역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미(未)복음화된 55개 국가, 30억 인구 중 97%의 인구가 바로 이 ‘10/40 창’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교의 노력을 이 지역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1989년의 마닐라 로잔 대회에서 대두되었습니다.
(*자료출처: GMI/GRDB 1990년)

좀더 구체적인 이유를 이곳 지역의 특성과 연관지어 살펴보면, 첫째로 이곳의 역사적, 성서적 이유 때문입니다. 이곳은 인류의 기원(起源)과 함께 성서(聖書)의 역사가 이뤄진 곳이며, 또한 세계의 4대 문명의 발상지(發祥地)가 있는 지역입니다.
둘째는, 전 세계 인구의 60%가 이 지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토지 면적은 전 세계의 1/3에 해당되지만 인구는 전체의 2/3가 이 지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는 全 세계 선교사의 26%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째는, 主要 종교의 발상지이며 아직도 이들 종교들의 집단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지역 안에는 회교(22%), 힌두교(23%), 불교(5%) 등 3대 종교가 50%를 차지 합니다.
네번째는, 세계의 빈민(貧民)층이 거의 이 지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GNP가 $500 以下인 49개국 총 인구 30억 중 80%인 24억이 이 지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QUAL의 생활 수준 척도에 따르면- 평균 수명이 짧고, 영아 생존율이 낮으며, 문맹(文盲)율이 높은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에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西歐의 문닫는 敎會들이 회교(이슬람교)에 의해 사들여지며, 공산권이 몰락하고 있는 사이에 회교도들은 그 곳들을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지금까지의 싸움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였지만, 이제 부터는 이슬람교와의 싸움이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10/40 창’에는 강력한 회교국가들이 있습니다. 또한 서구 신흥 종교의 사상적 발상이 되기도 하는 힌두교가 강력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며, 불교의 아성(牙城)이 바로 이 곳입니다.

네팔은 바로 이 ‘10/40 창’에 속하여 있는 나라로 열악한 생활 환경과 힌두교의 강한 세력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선교도 어렵지만 교회의 성장도 아주 힘이 드는 지역입니다. 전형적인 미복음화 국가, 그리고 미전도족속이 아직도 많은 네팔에 우리의 관심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네팔을 위한 중보 기도제목

* 교회와 지도자를 위하여;
1. 힌두교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바른 신학과 신앙 위에 잘 성장하도록
2. 교회가 예배와 기타 활동에 제재나 방해를 받지 않도록
3. 미전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생겨 나가도록 (특히 서네팔 지역)
4. 목자가 없는 교회에 속히 신실한 목자를 보내 주시도록
5. 교회의 재정적 후원과 자립을 위하여
6. 각종 성거티(기도모임)와 주일학교가 활성되도록 (교사들의 헌신과 양성)
7. 지도자(목회자)들이 물질로 타락하지 않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하도록
8. 교회 안에 계급이 없어지도록 (네팔의 카스트 제도의 영향)
9. 교회와 지도자들의 연합을 위하여

* 교인들을 위하여;
1. 말씀과 기도 속에 신앙이 성장하며 삶이 변화되도록
2. 박해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3. 가정 복음화가 속히 되도록 (혼자 믿는 사람을 위하여)
4. 물질과 자녀의 축복(교육)을 받도록
5. 박해 속에서도 전도의 열심이 항상 있도록
6. 해외에 나가있는 노동자, 군인, 유학생들이 예수를 영접하도록
7. 대학생과 젊은 계증이 특히 복음을 듣고 예수 믿도록

* 복음 사역을 위하여
1. 교회와 선교사들이 잘 협력할 수 있도록
2. 선교단체들의 성령충만과 팀웍을 위하여
3. 신학교들의 성장- 헌신된 학생과 교수요원의 양성을 위하여
4. 각종 훈련기관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하여
5. 성경번역과 Gospel Recording사역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6. 부탄난민사역과 티벳인들의 사역을 위하여
7. 예수영화 사역과 방송선교 및 문서선교를 위하여
8. 미전도 입양 운동: 관여된 현지교회와 입양교회 그리고 부족
9. 선교사들의 비자와 자녀교육을 위하여
10. 한국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의 사역을 위하여

* 정부와 위정자를 위하여;
1.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2. 개종을 금지하는 악법과 비자법이 고쳐지도록
3. 정부가 안정되고 기독교에 대한 호의를 갖도록
4. 정부각료들과 삼부요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도록
5. 왕과 왕족들이 복음을 듣고 힌두교와 연결된 끈들이 끊어지도록
6. 힌두제사장과 브라만 등의 계급이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회의를 갖도록
7. 마오이트들의 활동이 사라지도록

허인석 네팔 선교 사역 목표

지도자 육성을 통하여 네팔 교회의 성장을 돕는다.

주 사 역 내 용
1. 교회지도자 훈련과정 4. 켐퍼스 사역
2. 가정 사역 5. 서쪽 네팔 교회 지도자 훈련 사역
3. 귀납적 성경연구 과정 6. 선교 학교 운영

2007년 네팔선교 사역 보고
네팔의 상황
은둔의 나라로도 알려졌던 네팔이 약 140여 년 동안 <라나> 수상 가문의 전제 정치 아래에 폐쇄되었던 문호를 연 것은 1951년에 트리부반 왕정이 재건되고 부터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서양 선교사들은 주로 “사회 개발 사업”(의료, 국토개발, 전문기술 진흥 등) 등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왕정부가 선교사들로 하여금 정치적이고 종교적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개인들은 은밀한 가운데 선교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네팔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 2월 ‘네팔의 민주화 사태’를 계기로 네팔의 교회는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헌법에 의해 전도하거나 가르치다가 경찰에 붙들려 2년 내지 6년의 형으로 감옥에 갇혔던 기독교인들이 풀려나게 되었으며 제한적이나마 종교 자유의 인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네팔에 입국한 때는 이와 같이 네팔 교회가 초기 부흥을 맞이하며 교회에 지도자의 육성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힌두교 왕국인 네팔이 최근에는 기독교가 3.0%까지 이르는 등 네팔 교회의 성장은 세계 교회가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네팔의 교회들은 거의 가정 교회 규모이며, 목회자들은 대부분 평신도 출신으로 신학적 배경이 없어서, 교회 성장과 교인들의 바른 신앙에 큰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6개월 과정의 목회자 합숙 훈련원(느헤미야 훈련센터)을 세워 그동안 500여명을 지도자를 도왔고, 지금은 제가 개발하였던 이 과정을 네팔의 10여 군데의 교단과 교회에서 함께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부터는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하여 2개월 과정의 <귀납적 성경공부> 과정을 도입하여 교회 안에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각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교회에서 <말씀 사역>을 하게 함으로써 개 교회의 목회자를 도와 교회의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제 약 700여 명이 저희 <느헤미야 훈련원>에서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네팔 각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시작하여 모택동주의자들이 왕 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빼앗으려는 사태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대부분의 지방을 장악하므로 서 네팔은 정치가 마비되고 경제가 초토화되는 고통스런 “내전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4월에 <19일 간의 민주화 데모> 끝에 왕정권이 완전히 물러나고 공산반군을 포함한 과도 연합 정부가 구성되어서 이제는 <헌법 개정>과 <국민 총선>을 UN의 도움아래 치루고 새로운 헌법과 정부를 만드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힌두 왕국>이라는 공식 명칭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치적 안정을 찾고 교회가 크게 부흥되면 네팔은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경제가 활성화 될 것이며, 국민의 삶이 달라지며, 주변 국가 특히 인도 북부에 선교를 책임지는 축복받는 나라가 되리라 기대하며 저희들은 일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연수
첫 4년(1994-97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았으며, 두 번째 단계인 4년 동안(1998-2001)은 다른 교단과 교회가 본 과정을 도입하여 정상적으로 운영하도록 돕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지금은 느헤미야 훈련원을 통해 기존에 배출된 목회자를 재교육시키는 일과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전문성을 높이는 일에 준비 중입니다. 지난 12월 10일 용인의 주북교회 조인철 목사님이 오셔서 한 주간 특별 세미나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보고 2007년에는 이러한 재교육 과정을 두 달에 한번 정도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성 지도자 훈련과 상담 사역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은 네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네팔의 교회에도 여성신도가 남성에 비하여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성장과 여성교인들의 신앙의 활성을 위한 여성 지도자들의 신앙연수를 목회자 연수와 병행하여 실시하므로 그동안 300 여명의 여성 지도자를 도왔으나, 앞으로는 가정 사역(Christian Home ministry) 중심으로 사역을 전환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한 때(1999년) 전화 상담을 중심으로 2개월간 40여명을 훈련시켰지만, 시기상조임을 판단하고 중단한 뒤 그동안은 부분적으로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12월에 아내 양명희 선교사가 현지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가정 세미나>를 하고 난 뒤, 큰 호응을 받고서 2007년부터는 두 달에 한 번씩 일 주 세미나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세미나는 주로 자녀 교육, 부부 생활, 결혼 예비학교, 대인 관계 등의 내용입니다.

귀납적 성경연구
2006년도에도 5차례 총 84명의 훈련생이 66권의 성경을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9주 코스의 훈련(매일 오전)을 마쳤습니다. 아울러 훈련과정 속에 <말씀 사역>을 위한 내용을 현지 전문 단체들과 협력으로 각각 일주일씩(매일 오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네팔 CCC의 도움을 받아 전도 훈련(LTI)을, 현지 어린이 선교단체와 주일학교 교사 강습을, 와 셀 모임 훈련을, 그 외에 walk through the Bible, 설교, 교회 교육, 영성 훈련 등입니다. 또한 영성을 위하여 매일 아침 새벽 5시에 한 시간씩의 새벽 기도, 매일 성경 한 구절 암송모임(네비게이트 교제), 저녁시간의 셀 모임 등등 교회 사역자로 세우기에 필요한 과목들을 가르쳤습니다. 네팔 교회도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캠퍼스 사역
제가 <마헨드라 국립사범대>에 교육과정 전문위원으로 위촉받아서 6,500명의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략적 사역에 그동안 (5년 이상) 힘을 기울였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른 학교 분위기와 동역자의 역 부족으로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금년에는 OM 단기 선교로 온 한국 청년들의 힘을 빌려 캠퍼스 내에서 한글과 음악 교육을 시켰고 개인적인 전도 접촉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도움을 줄 한국 청년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범대 사역은 네팔 복음화의 아주 좋은 전략입니다.
또한 5명의 네팔 대학생을 한국으로 유학 보내므로 서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네팔 청년들이 전주(비젼대학)와 목포(동아인재대학)에서 학교와 주변 교회의 도움을 받아 신앙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건만 되면 더 많은 대학생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네팔의 대학생 선교회(CCC)와 협력하여 캠퍼스 사역을 도왔습니다. 사랑방을 열어 7명의 대학생들이 함께 자고 먹으며 제자 양육의 과정에 있습니다. 이 일은 네팔 CCC 간사 한명이 돕고 있는데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모임, 성경공부 등이 있고 학교생활 중에는 함께 전도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방세를 후원하고 있는데 그 외 재정은 학생들 스스로가 조달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영성과 인격 성장에 효과가 있습니다.

서쪽 네팔 훈련원 개설
네팔에서도 서쪽은 복음이 별로 들어가지 못하고 또 교육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크게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서쪽지역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또 훈련생들을 적극적으로 오도록 하며 이 지역을 도왔습니다. 그 지역의 몇 분 목사님들과 협력하여 저희 훈련 과정을 그 곳에 유치하려는 노력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훈련원에서 함께 일하던 <갈렙>형제 부부가 자기 고향이기도 하여 그곳에 헌신하였습니다. 마침 공산반군의 사태도 이제는 중지되기도 하여 2006년 7월에 서쪽 네팔 <느헤미야 훈련원>을 열고 다섯 번에 걸쳐 100명 정도의 훈련생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동안 마음을 두고 기도하며 힘썼던 일이라서 저희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형제 부부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고 (3년 후에 돌아옴) 현제는 그 동생이 일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에게 양육을 받았던 <아사> 형제가 한국에서 신학을 마치면 내년 3월부터는 그곳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교인들과 교회에 부흥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훈련원 건축
네팔에 온지 12년 동안 자체 건물도 갖지 못하여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사역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의 가난함에 현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나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팔에 다녀가신 분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훈련원 건축>을 부추기시며 2005년 말에 모금을 시작하여 바로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왜냐면 제가 한국에 들어가서 모금을 다닌 것도 아니고, 또 생각보다도 훨씬 큰 집을 아주 싸고 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 이였습니다.
당시 저는 약 80평정도 대지에 작은 건물을 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좋은 위치에 (평당 5-60만 원 정도로 카투만두는 생각보다 훨씬 땅값이 비쌉니다) 250평 정도의 대지에 2층 건물을 샀습니다. 현지 지도자들도 모두 기뻐하고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금년 한 해 동안 건물을 고치고 3층의 반 절 정도 빈 옥상에 강의실과 숙소를 보충하는 공사를 완전하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훈련원 건물은 원래 개인 주택이라서 많은 시설 개축이 있었고 앞으로도 부속 건물(예배 홀과 식당 화장실 등)을 계속 지어야 합니다. 2007년 중에는 건축 허가를 받는데 꼬박 시간을 소비하였습니다. 왜냐면 건물을 지을 자리가 도로 계획이 나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전혀 도로가 필요없는 곳이고 이미 딴 사람들은 건물들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정식으로 민원을 내고 법적처리를 하여 이제는 완전히 도로 계획이 취소되었고 건축 허가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관계 공무원이 뇌물을 요구하고 트집을 잡는 바람에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넓은 공간과 편리한 시설들 속에 훈련생들이나 저희 직원들 모두 기쁨가운데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건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일했지만 막상 자체 건물을 가지고 훈련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다보니 진작 좀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느낍니다.

선교 훈련학교 운영
훈련원의 넓은 공간 때문에 지난해 한국 청년들이 몇 개월씩 선교 훈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주로 대학생들로서 6개월 내지 1년씩 휴학을 하고 영어와 타문화 훈련 그리고 선교 참여를 목표로 옵니다. 또한 트레킹과 인근 국가 여행 등 힘들지만 풍성한 경험들을 할 수 있었으며 비록 네팔에서의 짧은 기간도 이들의 신앙과 삶의 자세를 변화시킬 수 있었음을 보고 감사하였습니다.

자 기 소 개 서

허 인 석

대학시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저는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고교시절, 인생의 참 목적과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하여 방황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저에게 성장 배경이 되었던 유교의 사상도, 열심히 뒤적이던 그 어느 책 속에서도, 그리고 밤을 새며 토론하던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저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따라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디뎠습니다. (1973년) 그리고 또한 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경의 첫 줄에서부터, 저는 그 권위에 놀랐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으며 제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였습니다. 예배와 찬송은 저에게 깊은 감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평생 주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방황은 끝나고 주님이 주시는 깊은 평화와 사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성장하였습니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저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한 전주 북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뒤(1974년 10월) 기쁨으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대학부 임원,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그리고 C.C.C.에서 실시하는 훈련과 수련회 등에 참석하여 ‘민족 복음화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인생 중 한 번쯤은 꼭 ‘단기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군에 입대하여서는 기독 장교 모임(O.C.U.)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병사들의 신앙생활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교사가 변화되어야 학생도 변화를 받는다’는 생각 속에 동료 교사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신우회를 조직하여 학생 전도에 힘썼습니다. 또한 나사렛 형제들(평신도 선교 단체) 모임을 통하여 직장 복음화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하나님 앞에 다짐했던 ‘단기 선교’의 약속은 늘 마음속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헌신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10년간의 교직을 끝으로, 1989년 7월에 필리핀으로 떠났습니다. 아내 역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함께 제 뒤를 따랐습니다. 3년간의 헌신을 위한 출발이였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신학 연수(석사과정)와 함께 선교훈련 그리고 사역(대학생 전도와 교회개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ISOT(International School of Theology)는 이 세가지를 위하여 저에게 좋은 과정이였습니다. 교수들은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그들은 학문의 깊이 뿐만 아니라, 인격 훈련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였습니다. 타문화권에 대한 적응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의 공동체 생활도 좋은 경험이였습니다. 교회 개척 사역은 팀사역이였기에 가능하였읍니다만,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3년 동안의 필리핀 생활 속에 주님은 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한편 필리핀에 있는 동안 어느 네팔 목사님을 만나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네팔 교회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91년 6월에 네팔을 방문하여(1개월 간) 네팔 교회를 살펴 보았습니다. 가난과 힌두교의 우상 속에 얽매여 사는 네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 합동(개혁) 신학교에 편입학하고 줄업을 한 뒤 목사로 안수를 받고 1994년 네팔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희 부부를 평생 선교사로서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네팔 목회자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네팔은 세계 유일한 힌두교 왕국(王國)입니다. 개종이 법으로도 금지되었던 네팔은 얼마 전까지 만하여도 전도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을 체포하여 2년 내지 최고 6년형의 징역을 처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네팔 사태’와 총선거를 기점으로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바뀌고, 새로운 정부에 의하여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던 크리스천들이 모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네팔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현재 교회가 급속히 늘어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거의 가정 교회 규모이며, 목회자들은 대부분 평신도 출신으로 신학적인 배경이 없어 목회에 대한 전문지식을 절실히 요구합니다. 그래서 저는 1994년 내팔에 도착한 후에 많은 기도와 준비 끝에 5개월 과정의 목회자 연수원을 세우고 네팔의 교회 지도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개발된 ‘BTCP'(Bible Training Center for Pastors)의 커리큘럼과 네팔어로 번역한 교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현지 교단을 도와 저희와 같은 프르그램을 운영하는 훈련원도 많이 생겼습니다. 또한 영국에 가서 일년간(1997/ 98) 귀납적 성경공부를 하고 와서 4개월 과정의 귀납적 성경 과정을 가르치는 훈련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역을 확장하면서 힘써 일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우상 숭배’ 속에 살고 있는 네팔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날로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선교사로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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