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의 순회선교 30년 여정 – 노종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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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말레이시아선교50년을 맞으며>

떠돌이의 순회선교 30년 여정(1988-2015)

노 종 해 목사 (말레이시아 선교사)

들어가는 말: “선교사”, 그들은 누구인가?

첫째, 떠돌이“(Wandering)들이다. 예수님도 “떠돌이”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셨고(마5:23-25), 제자들도 “떠돌이”로 부르시고, 분부하셨으며(마10:1-42), 사도 바울도, 초대교회 전도자들도 “떠돌이”였다. 고향, 친척, 부모 형제, 모든 지위, 신분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가슴에 품고, 아무 보장도 안전도 없는 세계로 떠나는 ”떠돌이“(Wandering)인 것이다.

둘째, “떠나가는 사람”들이다.(Leaving). 떠돌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성도의 모임, 공동체“(교회)를 이루고 ”떠나가는 사람“(leave for missionary work)들이다. 바울사도는 떠돌이 선교사(Wandering Missionary)로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 데살로니카, 안디옥 등 ‘성도의 모임, 공동체”를 이루고, 전도인, 사역자를 세워 맡기고 흔쾌히 그분의 뜻을 향해 떠났다. 나는 “목회자”와 “선교사“를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가? 돌보며 누리는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비져너리(Visionary)들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바라보며 그 뜻을 품고 나가는 비져너리(Visionary)이다. 그의 현실은 비참하고 처절하다. 시련과 고난이며 비난과 박해가 도처에서 내외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실에 처한다. 그럼에도 그분의 뜻을 품고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비져너리인 것이다.

1. “떠돌이”의 순회선교 착수
나는 1985년 4월 4일,‘한국 감리교 선교1백주년 기념대회’ 때 역사적인 연합 연회가 모인 자리에서 서울연회로부터 일본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담임목회를 하던 온양온천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결단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정부는 재일 동포들의 법적지위 향상 운동을 문제로 삼아 법무성에서 한국 기독교 5개 교단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를 입국하지 못하게 하고 기약 없이 미루고 있었다.

나는 일본 선교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동안, 본부 선교국의 제안으로 파송지를 변경하여 “말레이시아”로 1988년 6월 결정할 수 있었다. 이는 선교사로 파송 받은 결심과 선교사 신분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당시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울 때가 아니다). 나는 1988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 독립일에 선교사로 말레이시아 연방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여, “떠돌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하는 중 ‘Special’이란 도장과 함께 2주간 체류를 받았다. 나는 특별 대우해 주는 줄 알았는데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 한다. 선교사로써 이슬람 땅에 도착한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2주 만에 싱가포르를 버스로 밤새도록 간 것이다. 선임선교사를 찾아 갔고 싱가포르 선교관에서 묵으며, 안정되고 활발한 선교 현장의 모습을 부러움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싱가포르를 다녀와 1988년10월 1일 부터 목사관을 ‘선교센터’라 불렀다. 또한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 인근 국가 선임 선교사들을 찾아가서 저들의 선교활동을 눈여겨보며 배우려 했다.

우선 1998년 10월,“말레이시아 감리교회“(Medistist Church of Malaysia) 본부를 방문하여, 황감독(Bishop Fang)님을 접견하고, 선교사 도착 인사 드렸으며, 12월에는 ”말레이시아 감리교 총회“에도 참석하여, 감독님의 소개와 환영 속에 인사하여 선교협력을 이루어 나갔다. 이로써 현지 감리교회와 협력하여 본토 원주민 오랑아슬리(Orang Asli) 선교가 착수 되었고, 동 말레이시아 사라왁, 사바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2. 선교의 기지인 선교센터 설립
나는 우선적으로 선교센터가 될 수 있는 대지와 건물을 찾았다. 도대체 임대 주택과 현지교회를 사용하며 어떻게 선교의 기지를 확보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없는 맨땅, 이슬람 국에서 선교센터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말레이시아 감리교“ 감독 데니스 더튼(Bishop Rev, Dr Denis Dutton)으로부터 선교센터 장소를 소개 받았고, 이때부터 선교지를 방문하는 한국의 목회자, 선교동역자들을 안내하여 남의 땅, 건물 앞에서 ‘이 땅을 선교센터로 주십시오.’라며 함께 기도하였다.

나는 1989년 ‘말레이시아 한인교회 창립 7주년 기념집회’를 개최하며 한국교회를 초청하였다. 기도는 이루어져 9월에 계약하고, 10월에 대지 5백 평, 2층 단독 주택 건물을 매입하여 수리 공사를 마치고 입주하였으며, 1990년 3월 등기완료하고, 8월 18일 ‘선교센터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동남아 선교센타”에서 초교파적으로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이 협력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3. 선교는 교회 중심이어야
나의 선교관은 “선교는 교회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말레이시아 현지 기독교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하였다.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선교현장조사와 교회현황을 조사하며 선교협력을 모색하였다. 각 교단 총회, 지방회 뿐만 아니라, 선교 세미나, 목회자 집회 등에도 참여하였고, 특별 집회와 절기 때마다 참여하였다. 또한 “교회협의회”(NCCM), “복음주의협의회”(NECF), “말레이시아 기독교 연합회”(CFM) 집회에도 참여하였다. “말레이시아 신학대학”(STM), “말레이시아 성서공회” 등 기관도 찾아갔다. 말레이시아 교계 지도자들이 나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현지교회에서도 환영해 주어, 선교 협력을 공고히 하여, 현지선교에 매진 할 수 있었다.

이슬람권 선교사는 신분을 노출 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선교지 언어를 익혀야 한다. 나는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여 우선 국립대학인 “말라야 대학”(University of Malaya), “말레이어 언어(Bahasa Malay)”과정에 등록하였고, 학생증을 발부 받았다. 이 학생증은 나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요긴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운전 면허증도 좋은 신분증이 되었다.

결국 현지교회와의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교포선교도 전국으로 확장하게 되었고, 정글 원주민 오랑아슬리(Orang Asli) 셍오이족(Sengoi) 선교, 동 말레이시아 사바, 사라왁 주(Sabah, Sarawak) 원주민선교, 도시 선교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선교센터에서는 현지인 교회와 전도인양성 성경학교인 “교역신학원”도 개척 시작되었고, 아내 최완숙 선교사는 현지교회들의 강단 꽃꽂이 강습회로 좋은 반응을 받아 선교에 기쁨을 얻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최초 “한인유치원”도 개교케 되었다.(1993년)

4.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로 받은 은혜 나누는 선교
선교사와 현지교회와의 관계를 세 가지고 나눌 수 있다. 첫째 현지교회와 무관한 관계, 둘째 현지교회에 예속된 관계, 셋째 현지교회와 협력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나의 선교 방침은 물론 세 번째 방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되었으니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고 협력하는 관계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선교의 큰 문제점은 현지교회를 무시하거나 과신하는 것이다. 돈, 인적세력과 성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는 선교에 큰 피해를 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교는 구원의 은혜를 나누는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받은 은혜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원주민 정글 오랑아슬리(Orang Asli) 선교에 있어서도 우선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임을 서로 확인해야 한다. 나는 말레이시아 감리교와 협력하여, 정글 원주민을 1989년부터 접하기 시작하여 전도인 양성 집회, 정글 마을 개척 전도, 자립교회 정책으로 염소 및 양계사육 정책 및 찬송가 출판 보급, 성경 반포, 봉사선교 활동 등을 시행하였다. 1991년부터 전도인 양성을 통해 교회개척을 시작하여 60여개 정글 원주민 셍오이족 교회를 개척 건축하였다. 1998년부터는 젊은 협력선교사들에게 원주민 선교지를 분할 담당케 하고 나누어주고 서로 협력하여 선교하도록 하였다.

5. 21세기 선교는 도시복음화로
21세기에는 세계인구 70%가 도시 영향권에 산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으며 선교학계에서도 도시선교가 21세기 선교의 중심이 된다고 보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도 경제성장으로 급속히 도시화되고 있으며, 도시로 인구가 몰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선교는 여전히 농촌, 정글 산 속 중심이며, 그것도 교회 개척과 건축에 국한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제 우리는 도시 복음화를 중요시해야 한다. 도시에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층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다. 도시 선교를 위해서는 다양한 선교 기능을 가진 전문인들이 필요하며, 각기 기능을 가지고 협력해 나가야 한다.

나는 도시복음화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중 도시 복음화를 위해 교역신학원(School of Ministry, Kuala Lumpur)을 1996년에 선교센터에서 개교하였다.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일요일 오후 5시까지 10시간 성경과 교리, 전도에 대해서 강의 들으며 무엇보다도 체험 있는 믿음 위에 서도록 뜨겁게 기도하는 전도학교이다.

또한 교회 설립이 금지되어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도시 현지인 예배를 선교센터 예배실에서 주일예배를 현지 선교 파트너인 다니엘목사와 시도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1996년, ‘레마개척전도회(Rhema Global Outreach)’를 설립하였고, “쿠알라룸푸르 레마교회”로 출발하였다. 이교회는 1997년 말 100명이 모이게 되어 선교센터에서 상가 건물 3층을 임대해 옮겼으며, 2002년도에는 2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여 자립하고 있으며 쿠알라룸푸르 수도권 인근 개발도시에 6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나의 선교 정책은 간접선교 방식의 직접선교이다. 즉 현지 전도인을 양성하여 저들로 하여금 복음 전도에 주력케 하는 정책이다. 그래야 저들의 교회가 되어 선교사가 떠나도 복음 선교는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현지 개척교회인 레마교회와 교역신학원은 2004년 성장하여 현지인 동역자(파트너)들에게 인양하였으며 자립 운영하도록 하였다.

6. 디아스포라선교는 세계 선교의 기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해외 한인교포가 7백만 명을 넘는다 한다. 이들에 대한 영혼은 누가 책임지는가? 한국교회는 선교 차원이 아닌 목회 차원에서도 해외 교포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선교가 있어야 한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한인교포를 외면하는 것은 선교의 중대한 실책이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라 하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동족을 구원하는 일을 하였고, 그는 동족 유대인 때문에 무수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동족 구원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한국교회는 교포 선교를 외면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해외동포인 한인들도 선교 대상으로 삼고 한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 가는 “디아스포라선교”에 착수하였다.

한 사람을 위해서 9시간 자동차를 몰고 가기도 했다. 이러한 전도 목회활동을 통해 서 말레이시아(말라야) 주요도시 6개 처에 한인교회가 개척 되었다. 쿠알라룸푸르 한인교회(1982년)를 중심으로, “조호바루 한인교회”(1988.12.), “이뽀 한인교회”(1992년), “페낭 한인교회”(1993년), “세렘반 한인교회”(1995년), “뜨렝가누 한인교회”(1996년)를 개척설립하였고, 부목사들과 협력선교사들을 담임자로 파송하였으며, 선교 분야와 지역도 분할하여 주어 협력선교, 팀 선교를 이루게 하였다. 후진 선교사들의 앞길을 열어 주고 저들 스스로 받은 사명을 향해 나가도록 하였다.

또한 교육분야도 창립 개척되어 말레이시아 최초 한인유치원 개원으로 교육선교도 힘차게 착수 되었다. 한인교회가 개척 창립된 곳의 교육선교 기관으로는 1) ‘쿠알라룸푸르 한인유치원“, 2) ”페낭 한인학교“, 3) ”페낭한인유치원“, 4) ”세렘반 한인유치원“, 5) ”세렘반 한인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새 천년, 2000년에 들어서며 13년 동안 목회하던 “쿠알라룸푸르 한인교회”도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였음으로 한인목회 전담 목회자를 세워주고(2000. 5), 나는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써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원주민 현지 선교에 주력하였다. 또한 “말레이시아 한인교회 연합회”를 조직하여 질서 있게 서로 협력하고 선교에 동참토록 하였다. 이 연합회가 현지 교단 및 교회협의회(CCM), 복음주의 연맹(NECF)등과 협력하여 원주민 12개 교단 목회자 학교, 베트남 교역자 양성 사업 등을 지원 협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선교사 가족 수련회도 외부 지원 없이 스스로 감당하였다.

7. 동남아 이슬람 선교를 향하여
나는 동남아시아 이슬람 선교에 목표를 두고, 선교의 목표를 더 좁히고 구체화 시켜 동남아 이슬람의 주요 인종인 말레이(Malay)족을 선교 목표로 삼았다. 말레이(Malay)인들은 3억6천 명으로 세계에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 태국남부, 싱가포르, 브루나이에 퍼져 있는 “동남아 이슬람 세력의 중심”임을 알았다. “말레이 이슬람”, “말레이 무슬림”선교를 추진하기 위해 ‘동남아 기독교-이슬람 관계 연구소“(Christian-Muslim Research Centre, CMRC)를 세웠다. 선교센터에는 동남아시아 이슬람 자료실이 설치되었고 1,600여권의 이슬람 서적과 다양한 자료, 문헌, 간행물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센터 공식 명칭에 ‘이슬람’이란 말이 민감하여 쓸 수 없어, 영어로 표기할 때는 ‘Mission Center for South East Asia, Kuala Lumpur’라 했다.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를 추진하며 이슬람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평생선교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단기 선교사가 아닌 평생 선교사를 한국교회가 양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남아시아 기독교와 역사 문화, 이슬람 선교를 위해 틈틈이 조사한 것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방문 때마다 ‘이슬람과 이슬람 금융(Sukuk)이 몰려오고 있다’고 당황하는 현실을 보았고, 범 기독교적인 대책이 긴급하다고 여겨, 소장하고 있던 이슬람 서적 1,600권을 2011년 5월 3일 서울 감신대(MTU)에 기증하였다. 또한 기독교-이슬람 관계센터(CMRC)를 국내에도 설립하여, 아시아 이슬람 동향과 정보, 정경(政經) 선교분야에 중심을 두었다.

이슬람선교에 임하며 “이슬람 현실, 상황”에 대해 글쓰기를 시작하였고, 자료집 1-10권을 발간하였으며, 저서로는 “말레이시아를 알자”(1993)“東南亞 이슬람과 韓國基督敎 宣敎”(2002)와 “말레이, 그들은 누구인가?(2011)”를 출판하였고, “이슬람, 그들은 철옹성인가?”(2015)는 출판 준비해 놓고 있다. 이슬람을 알되 교리적, 경전적, 사상적 이해가 아니라, 이슬람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무슬림들과 교류를 넓히며 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동남아 선교 센터 홈페이지(www.sunkyoro.org)는 2007년 10월에 중단되어 복구하지 못하다가 2008년 10월에 리모델링하여 재개하였다. 이로써 선교지 동향과 정보, 선교활동을 나누고 기도하며 참여하도록 정보 제공하는 전산선교(IT Mission)도 착수하게 되었다.

8. 무슬림 선교와 사랑, 봉사의 선교
나는 무슬림을 지켜보면서 저들에게도 갈등과 문제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 뿐 아니라 가정문제, 청소년 문제, 여성문제, 인간 삶의 본질적 문제 등 사회문제도 많이 있다. 더욱이 결손 가정이 많은 것을 알았다. 젊은 엄마와 어린이들,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에게 사랑의 손길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무슬림 전도와 교회 개척을 연계시켜 “돌봄의 집”(Diakonia Home)을 설립하였다. 주택 가정집을 임대하여 조용히 시작한 것인데 반응이 의외로 좋고 타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엄마와 어린이, 청소년들을 현지교회와 협력하여 수용 보호하고, 학령 어린이들과 청소년은 공립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가정학교”(Home School)를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교육은 물론 사회생활에 적응 할 수 있도록 교육 계획을 세워 매일 가르치고 있다.

아내 최완숙 선교사는 한인목회 할 때 사모로써 독자적인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으나 2000년부터 현지 사역을 중심으로 새 출발하였음으로 아내에게, ‘사모’에서 ‘선교사’로써 사회봉사 및 교육 분야 선교 사역을 맡겨 주었더니 지금도 기쁘게 잘 감당하고 있다.

2002년 현재 쿠알라룸푸르에 2개처, “센툴 홈”(Suntul Home, 1996년 설립)과 “디딤돌 홈”(Stepping Stone Home, 2000년 설립)이 있으며, “디딤돌 가정학교”(Stepping Stone Home School)를 운영하였다. 이들 홈과 학교는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교사도 양성하여 현지 동역자(파트너)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주요 도시에 사회봉사 선교 홈을 설립할 계획이다. 여기서 성경공부 및 신앙훈련이 이루어지며 기도회로 사실상 교회 개척이 이루어지고 있다.

9. 동남아시아 종족난민선교
말레이시아 인권단체의 “2010’인권 보고서”를 보면, UNHCR에 등록된 난민통계(2010년 9월 30일)는 미얀마 82,936명, 스리랑카 3,971명, 이라크 675명, 소말리아 1,010명, 아프카니스탄 1,119명, 기타 7,293명이라 발표했다. 기타에는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이다.(SUARAM:”Malaysia Human Rights Report 2010”-Civil &Political Rights,p144).

이는 UNHCR에 등록된 “난민”(Refugee)으로 실제로의 난민은 3배 이상이 될 것이며,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임시 체류자, 불법 이주민으로 분류되는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합치면 1백만에 이르러 말레이시아는 “불법이주민, 난민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레이 무슬림 사역“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긴박한 종족난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종족난민선교“는 이슬람 사역을 위해서도 긴요하며, 난민 중에는 이슬람 난민도 많고, 저들은 말레이 무슬림의 이웃이요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쿠알라룸푸르 도심과 인근 정글에 수많은 아시아 난민들이 임시 거처를 만들고 합숙 또는 노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정치적, 종교적 박해와 전쟁과 소수인종 분쟁, 자연재해, 재난 등으로 피난 와 있는 이들이 말레이시아에 3백만 명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2003년부터 난민 선교에 들어가 정글과 도심 곳곳을 심방하며 찾아보았고,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이들은 성경책은 물론 찬송가도 없는 것을 알았고, 하까(Hakha) 종족 찬송가 2천 권을(2004년도), 조통(Zotung)족 찬송가 1천 권(2008. 6) 출판해 주기도 하였다. 이런 난민을 구호 차원이 아닌 복음으로 접근하고 있다.2004년 4월에 동남아 선교센터를 쿠알라룸푸르 도심으로 이전하고, 다인종 다언어 교회인 갈릴리 인터내셔날 교회(Galilee International Church KL)를 창립하였다.
<종족어 찬송가>는 Size- 198 x 130mm, Extent-556pages, text +4 pages cover로 출판되었으며, 2004년부터 2012년까지 Hakha족, Zotung족, Mara족 3개 종족어로 7회, 1만4천권을 출판 보급하였다.

찬송가는 말레이시아의 난민종족들에게는 물론,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 동남아의 동족들에게 퍼지며, 미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한국 등 전 세계의 동족 난민들에게 퍼져 선교 효과를 극대화하게 되었다. 마치 풀씨 마냥 정글, 도심 곳곳에 퍼져 복음을 전파하며 성도의 모임을 이루고, 교회를 세우는 동인이 되었다.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소식 전하며 나누는 계기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동남아선교 센터”는 주일예배 뿐 아니라, 교회학교, 신앙강좌, 전도집회, 사경회, 기도회, 결혼예식 등 복음 전도에 매우 분주하고 유용한 선교센터가 되었다. 갈릴리 인터내셔날교회는 매 주일 정규적으로 예배를 4차례, 각기 다른 언어로 드리고 있다. 선교센터 갈릴리교회에서 시작된 하까족(Hakha), 쬬통족(Zotung), 파람족(Faram), 라우뚜족(Lautu), 마라족(Mara) 등 종족 교회들이 자립하도록 지도하였고, 하카(Hakha) 종족교회는 쿠알라룸푸르(KL) 인근 8개 지역 교회로 부흥 성장하였다.

“동남아선교센타”는 개척 설립된 종족교회들을 자립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즉, “자립정책”으로 독립시킨 “친족“(CCF), “마라족 교회”(MCF), “라우뚜”(LCF), “조통족(Zotung) 등 종족교회들이 “난민연합(CCF) 8교회”와 ”말레이시아 종족 연합회“(MCCU)의 20개 종족 교회 등이 연합회를 이루고 부흥 성장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에도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교지 개척교회들이 성장하여 “연합회”를 이루고(CCF, MCCU 등) 찬송가 출판 7번째부터는 출판비도 2/3를 분담하여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더 없는 기쁨이다. 이러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 드리며, 그 뜻에 헌신하는 “선교지 교회”를 생각할 때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다.

10. 교육선교 “난민학교” 사역-“Hope for the Future”
아내 릴리안 최완숙 선교사는 교육담당 선교사로 난민학교를 운영하며 가르치고 있다. 난민학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협력과 보호 속에 활동하며, 말레이시아 케어 등 교계와 사회단체들의 관심 속에 운영되고 있다. 난민학교는 쿠알라룸푸르 도심에서 시작되어 2008년에는 교사10명, 학생 180명이 있으며, 쿠알라룸푸르 인근 5개 처에 분교가 있어 난민학교 연합(CSO)을 이루고, 교사30명, 학생 600에 이르고 있다.

“난민학교연합”(CSO)은 6개교로 임비(Imbi), 체라스(Cheras), 록여(Loke Yew), 뿌쫑(Puchong), 까짱(Kajang), 센툴(Sentul)교이며, 꺼뽕(Kepong, KL)에 “마라기독교학교”(MCS)가 설립운영 되고 있다. 난민학교의 표어는 “미래를 여는 희망”(Hope for the Future)이며, 열대열기 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수업하고 있다.

최근 국제 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UN,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의 관심과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 전쟁과 기아, 재난, 인종갈등 등으로 난민이 범람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에 있어서 주요 선교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11.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분야 및 원칙과 정책
동남아 선교센터의 기관과 선교분야 다음과 같다

1) Research Centre – 동남아 기독교-이슬람 관계 연구소
2) Bethel Mission – 도시선교(Urban Mission)
3) Mission for Southeast Asian Migration and Refugee-동남아 난민선교
4) Bumi Mission – 미 전도족, 원주민(OA) 선교, 소수종족 선교
5) Diakonia Home- 돌봄의 집, 사회 봉사선교, 디딤돌 가정학교
6) Leaders Training School- 전도인, 평신도 지도자 양성 사역
7) Diaspora Mission – 교포 선교, 한인교회 개척 설립
8) IT Mission – 전산선교, 문서선교, 문화선교
나의 선교원칙과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족선교의 원칙- 말레이시아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이다. 교회도 인종과 언어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와 문화가 같은 종족이 자신의 종족을 전도해야 효과적인 선교를 이루며 실제적인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이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전도인 양성의 원칙- 체험적 신앙과 성경중심 복음의 훈련을 받은 전도인을 양성하여 저들로 직접 전도하게 해야 한다. 선교사로는 지속적인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을 이룰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또한 자신의 종족 전도인이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기 때문에 전도인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 나는 이를 간접선교 방식의 직접선교라 한다.

셋째, 현지 교회와 협력의 원칙- 한국 선교사의 문제점은 현지교회에 예속되거나 현지교회와 무관한 선교, 현지교회를 이용하는 선교로 이를 탈피해야 한다고 본다. 현지 교단, 교회와 동반자(Partnership)로써 선교 협력해 나가야 한다. 약한 현지교회는 지원, 북돋아 주고, 활발한 현지교회는 협력하여 복음 선교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넷째, 사회봉사, 사랑의 선교의 원칙- 특히 이슬람권 선교는 사회봉사를 통한 선교와 교회 개척이 연계되어야 한다. 기존 교회로 인도하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박해, 망설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접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뤄 나아가 저들의 교회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사회봉사 선교는 교회 개척의 길이다.

다섯째, 협력선교의 원칙- 협력선교(Inter-Mission) 팀-선교(Team-Mission)를 이루어야 한다. 목회자 뿐 아니라 전산선교, 교육선교, 문서선교, 문화선교, 선교행정 담당 등의 기능 있는 전문인 선교사들의 협력이 요청된다. 단기선교도 선교사와 협력 관계 속에 이루어져야한다.

누가 선교사와 가족을 따뜻이 대해 줄까? 선교사를 깊이 이해하고 감싸주시기를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에 바란다. 선교사들을 보내 놓고 서로 비교하며 비평하기보다도 이해와 인내가 앞서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선교협력이 가능하다. 선교지에는 긴장과 갈등, 악령의 역사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과시적 선교, 전시적 선교, 감정적 선교를 탈피하고 성실하며 성숙한 자세로 한국교회와 선교 단체가 선교지를 보다 더 이해하고, 선교 현장 중심으로 선교 정책을 수립하여 세계 선교에 동참하기를 간곡히 바란다.

나는 2006년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2007년 초에는 “뇌졸중(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른편 팔, 다리, 손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발생했다. 암담하고 슬프고 눈물만 쏟아졌다. 2010년도에는 우측 눈의 “망막출혈”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투병 중에도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고, 주일 강단을 쉬지 않았다. 다닐 수 있는 대로 힘써 선교지를 다녔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걸었다. 이제 바라 볼 것은 오직 주님뿐이다. 그 분만이 치료하실 수 있으며, 회복시킬 수 있음을 체험했다. 지금도 오른편 마비 증세와 후유증으로 불편하지만 장애도 감사하며 즐기며 활동하고 있다. 선교차량도 운전할 수 있고, 언어 장애도 어느 정도 풀려 선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나는 투병 중에 2번 큰 수술 받았다. “망막출혈”은 수술하여(2011) 밝은 눈으로 회복되었고, “대장암”도 발견되어 암수술도 받았다.(2012) 또한 암수술 후 정기검진 중‘대동맥혹’(대동맥류)이 발견되어 수술을 기다리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당뇨병”도 관리 받게 되었다. 이로써 4대 중증을 모두 겪고 있는 셈인데 마음만은 평온하다. 내 모든 일, 주님께 맡기고 선교사명을 향해 나가고 있다.

나는 암 수술 후(4월 3일) 꿈속에서 “찬송” 부르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4월23일 밤). 꿈 깨어서도 한 동안 꿈속에서 불렀던 찬송을 불렀으며, 이 찬송은 바로 나 자신의 신앙과 기도였음을 고백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전에 나를 인도 하신 주 장래에도 내 앞에 험산준령 당할 때 도우소서.
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나리.’

12. 마침말; 떠돌이는 쉼이 없다-“내 몸과 맘을 주 위해”
나는 “선교사 출구전략”으로, 선교센타의 사역들은 후임 협력선교사들에게 이양시키고, 비거주선교로 동남아 이슬람의 중심인, “말레이 이슬람, 무슬림선교”에 집중하고 있으며, “무슬림 배경신자”(Muslim Background Believer, MBB)들을 돌보고 있다.

나는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참여하시는 선교동역자와 교회들을 늘 기억하며 올해(2012)로 30년째 선교의 사명 감당하고 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시고 세계선교에 참여, 후원해 주심을 감사드린다.

나는 떠돌이로 방랑자, 순회자이며, 떠나가는 자로 순례의 길을 동반자 길동무와 함께 묵묵히 뚜벅뚜벅 내 딛고 있다. 언제 어떻게 쉼이 있을지는 그분만이 아신다.

우리의 복음 전도의 사명 감당에는 쉴 수 없으며 박해와 거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이루심을 보며, 그분의 뜻, 선교의 사명을 향해 나가야 한다. 선교에 실패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盧宗海)

“날 대속하신 예수께 내 생명 모두 드리니…,
내 몸과 맘을 주 위해 다 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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