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게일 선교사-삭힌 홍어에 보신탕까지 먹은 ‘정신적 한국인’
1927년 무렵의 제임스 게일.
⊙ 캐나다 출신 선교사로 1888년 조선 땅 밟아… 36년 선교 중 10년간 평신도
⊙ 구약성경 번역 모임 참여… 《천로역정》과 《구운몽》도 번역
⊙ 언더우드가 설립한 儆新學校 교장 지내… 金奎植, 安昌浩 등 배출
6·25 전란을 피해 처가의 농지가 있던 군산으로 피란을 갔던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선비 차림의 예수가 흰 도포자락으로 나타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운보에게 꿈같이 나타난 예수의 환영(幻影)은 전란에 휩싸인 조국의 암울한 미래에 한 줄기 서광(瑞光)과 같아 일말의 안도감을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신들린 듯 침식(寢食)을 잊고 예수의 일생을 주제로 한 성화 30점을 연작(連作)으로 근 2년간에 걸쳐 완성한다. 운보도 죽고 없는 지금, 운보의 화업(畵業)을 되새기는 전시회마다 제일 많은 관객과 화제를 몰고 다니는 운보의 성화 작품은 이렇게 태어났다.
전쟁과 불안한 미래, 구원이 절실했던 청년 운보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태어난 성화 작품은 흔치 않은 동기 탓에 기독교 역사화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한국회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 되었다. 사실 운보가 그린 성화는, 소재는 성경에서 빌려왔지만 모티브는 《천로역정(天路歷程)》에서 빌려왔다
《천로역정》 한국어판 번역
1895년도에 출판된 《천로역정》의 그림 중 일부.
《천로역정》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작품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 중의 고전이다. 천로역정 한국어판은 1895년 김준근(金俊根)이 판화로 그린 상하 2책으로, 원산에서 목판으로 간행할 때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이 번역하고, 이를 소설로 펴낸 셈이다. 우리나라 첫 번째 근대 번역소설이다.
특히 일부 판화에서는 원근법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도 한복과 갓을 쓰고 있으며, 천사의 모습은 한국 고전의 선녀를 연상케 하는 등 유불선(儒佛仙)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 면에서 천로역정은 소위 기독교의 토착화(土着化)에 일조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요즈음 게일이 책을 펴냈더라면 베스트셀러에 판권 수입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책 한 권 낸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만은 아니었다.
게일이 펴낸 천로역정은 장안의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명문 세도가였던 윤치호(尹致昊)와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이 세운 기독교 출판사 창문사(彰文社)에서 거금 2만 엔을 들여 게일이 단독 번역한 개인 성경번역본을 출판했다가 자금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창문사가 문을 닫게 되는 참극마저 뒤따랐다. 1925년에 투자된 돈의 값어치가 2만 엔이었으니, 지금 시세로는 거금 13만1000달러에 해당한다.
원래 창문사는 YMCA를 중심으로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의 지식인 1200여 명이 규합하여 만든 기독교 출판사였다. 천도교가 《개벽》 잡지를 만들어 기독교에 도전장을 내밀자, 기독교 인사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만든 출판사였다. 당시 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 주류 인사들에게 소외감을 느낀 비주류 인사들의 구심점을 이루었다.
더욱이 게일이 번역한 구약성경은 공인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담임목사로 봉직했던 연동교인들이 출판을 돕고 나섰지만, 당시에 개인이 번역한 성경을 교회가 채택하는 것은 보수적인 분위기의 선교사들과 기독교계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결국 담임목사의 개인 번역 성경 출판을 주선했던 연동교회 교인들이나 창문사 모두 빚더미에 앉는 자충수(自充手)를 두고 말았다.
번역자들 간의 불화로 번역모임 탈퇴
운보가 1982년에 그린 성화의 부분도
게일과 연동교회 교인들의 시도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게일이 번역한 성경은 1910년판 번역 성경의 번역상의 오류를 고치려는 개역(改譯) 과정이었다. 그러나 1923년 게일과 개역자회 내의 다른 회원들과 견해 차이가 심해지고, 자신이 제안한 개정원칙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게일은 스스로 개역자회를 사퇴했고, 1925년 개인적인 구약 개정본을 완성했던 것이다.
게일 혼자의 힘으로 번역한 개정본 출간이 성경위원회로부터 거부당하자, 게일은 성서공회의 개역위원회와는 별도로 자신의 번역본을 발간했다. 그러나 기독교계는 게일의 번역본을 외면했다. 게일이 개역자회를 탈퇴한 이후 1937년 6월에 확정된 개역 성경만이 지금 기독교계에서 폭넓게, 공식적인 성경으로 통용되고 있다.
제임스 게일의 초기 성경번역에 대한 공로는 실로 큰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위원들과의 불화로 그 빛이 퇴색되었고 본래의 공로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번역의 원칙에 대한 이견과 위원회 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게일의 인간관계가 게일 같은 큰 인물이 평가되어야 할 대목에서 비켜간 아쉬움이 크다.
원래 게일은 스코틀랜드계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로 1888년에 조선에 왔다. 당시 총각이요, 목사가 아닌 평신도 신분으로 왔다. 그래서 딱히 주어진 사역이 없었다. 조선어를 배우는 와중에도 해주와 소래, 의주와 원산 등지에서 견문을 넓혔다. 그가 YMCA에서 파송된 신분대로 YMCA를 창립하고 그 일을 했더라면 우리나라 YMCA 역사도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토 YMCA의 파송을 받아 조선에 왔던 게일은 3년 만에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꾼다. 그는 목사가 아닌 평신도 신분으로, 이미 성경번역위원회의 멤버로 일하면서 신약 몇 권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가 목회자로 변신한 것은 조선에 선교사 신분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1897년이었다. 36년간의 조선 선교사 생활 중에 10년간을 목사가 아닌 평신도로 살아온 셈이다. 그가 평신도 선교사로 머물렀던 이 10년 기간 중에 조선어를 익히던 몇 해를 제외한다면 단지 몇 해 동안에 《천로역정》과 《한영사전》을 편찬함은 물론,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변역해 내었다.
더욱이 그가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했던 내내 동료 번역위원들로부터 그가 목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든지 차별을 받았다든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목사직이 천부적 왕권에 버금가는 권위로 대접받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상에 좋은 시사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가장 신성시되는 성경번역 작업에 신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단순한 문학사 출신의 젊은 평신도에게 차례가 주어졌다는 것은 가히 기적 같은 일이다. 감리회의 아펜젤러와 장로회의 언더우드, 레이놀즈와 같은 목사들의 열린 사고가 있었기에 가능했거니와 한국인들의 고정관념과 다른 이들의 관점이 단연 돋보인다.
게일의 성경번역은 본래의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 공로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계의 작업 이외에도 《구운몽(九雲夢)》이나 《영한사전》 편찬과 한국문학을 영역하여 국내외에 소개한 일은 게일의 탁월한 업적으로 남을 일이다. 그는 1927년 조선을 떠나 두 번째 부인의 고향인 영국으로 은퇴하여 74세의 나이로 1937년에 소천(召天)했다. 이 땅에서 36년 6개월을 살다 간 것이다.
朝鮮의 문화수준을 높게 평가한 게일
그가 서울에 왔던 1888년 당시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미국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감리회 소속 아펜젤러보다 햇수로 3년 반이 늦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의 탁월한 어학실력과 문화적 수용성이 넓게 인정되어 성경을 번역하는 위원회의 정규 멤버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선교사보다 조선의 문화와 기질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다.
“조선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조선인들이 결코 열등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것입니다. 만약 삶의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할 경우, 지적인 면에서 조선인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분명 어떤 강력한 힘이 조선의 문명 속에 내재하여 역사하며 그것이 오늘의 조선을 이루도록 만들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나이 든 조선의 어른들의 경험과 존중받는 풍습은 누구도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조선인들에게는 우리보다 더 많은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지상생활의 종말로 여기지 않듯이 위패(位牌)로 모셔지는 조상의 넋들이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중요한 모임을 주재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조선인에게 있어 살아생전 70살은 유한한 삶이 아니라 끝없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도 같습니다.”
게일은 조선에 온 지 8년이 지난 1896년은 일본 잡지에 ‘조선의 문명사’를 간추려 기고하였다. 조선의 생활과 음식, 문화적 이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게일의 조선 이해는 서양문화와 문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기 쉬운 당시 조선에 온 외교관들이나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행태와 거리가 멀었다.
단지 죽음을 지상에서의 종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망자(亡者)에게 올리는 제사가 살아 있는 사람이 주관하는 행위가 아닌 죽은 영혼이나 혼백(魂魄)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적극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조선 사람의 조상 산소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은 서양인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벽난로보다 더 친근한 생활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기독교나 본인이 소속된 장로교의 교리적 한계를 벗어나 가톨릭교의 문화적 접근법과 유사한 점까지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은 제사와 조상숭배를 철저히 금기시해 왔기 때문이다. ‘조상의 산소(山所)를 성지처럼 여기는 조선인들의 관습’을 단순한 관측이나 배견(拜見)이 아닌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우려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짙게 보인 점에서 게일의 입장은 한국인의 정서와 밀착 단계를 벗어나 동일시 여기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目不忍見의 선교사들
대체로 선교사들이 나이 30을 전후 해 조선에 왔는데 이들의 행동거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이러한 동료 선교사들의 모습에 분개하며 미국 장로회의 앨린우드 총무에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도대체 조선에 선교사로 일하러 온 사람들이 밤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11시 경에야 일어나 조선 하인들이 해 주는 아침 겸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겨우 예배를 보기 위해 얼굴을 내밀며 하는 말이 ‘조선 사람들에게서는 냄새가 나고 몹쓸 병균이 옮을지도 모르니 조선인들과 성찬식을 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는 시간을 나누어서 하든지 자리를 구별했으면 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들이 대체 어느 나라 민족을 섬기러 온 사람들입니까? 앞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을 보내실 때는 조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골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1934년 6월, 《동아일보》 사설에는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의 생활 행태에 대해 이러한 글도 보인다.
〈백만장자의 위치에 지지 않을 집에 편히 앉아서 남녀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는 (이국 땅에 와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주고 간) 쉐핑 양의 생애는 과연 어떤 음성으로 들려 올까? 그보다도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는 눈을 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 신여성들의 양심에 과연 어떠한 자극을 주고 있을까?〉
모든 선교사들의 생활이 귀족적이고 안하무인격으로 방자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행태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게일의 논지는 가히 칭찬 받을 만하다. 이는 그가 조선 민중의 삶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그들과 더불어 진실한 삶을 이어 가고 있었기에 ‘조선의 문명사’와 같은 글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게일의 사람 됨됨이는 그가 조선인들의 생활방식에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애정을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어제 밖에 나갔다가 천연두에 걸려 막 회복된 아이를 업고 가는 어머니를 지나쳤습니다. 마마는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졌습니다. 선교부에서 일하는 어떤 현지인도 걸렸습니다. 만약 토론토에서 이런 환자가 발생했다면, 전 시내가 들썩거릴 정도로 시끄러울 것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사용하는 침구(寢具)들은 그저 평범합니다. 저는 요 한 장에 몸을 둘둘 감고, 돌처럼 딱딱한 방바닥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곳이면 누워 잠을 잡니다. 처음에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져서 오히려 안락한 침대가 불편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제 식탁에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다 있군요. 그런데 저는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고 좋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몸에 좋은 것이라면 그것들을 저는 그냥 삼켜서라도 내려가게 합니다. 저는 거의 한 달가량 조선 음식만 먹었습니다.”
조선인들과 사랑방에서 하루 7시간씩 同居
선교사들의 현지 이해에는 음식뿐 아니라 현지인들의 관습과 신앙체계, 심지어는 무속신앙에 이르기까지 국민정서의 밑바닥에 흐르는 요인을 통틀어 비교해야만 한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외래종교인 불교와 유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접목되는 과정에 한국의 불교, 한국의 유교, 한국의 기독교로 승화되지 않고 한국의 심성과 기질, 문화가 오히려 이들에게 거꾸로 동화된 것을 애석히 여겼다.
마찬가지로 게일 역시 신채호와 동일한 생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기독교의 장점을 수용하는 한국적 기독교의 탄생을 지향하였다. 서구 문명을 일방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던 일부 선교사들의 무지와 맹목, 현지인들의 수준 이하의 생활양식에 서구적 평가로 잣대를 들이대는 우월주의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도 눈에 뜨인다.
“동양인에게는 배울 것도 있고 가르칠 것도 있다. 털이 덥수룩하게 난 선교사가 와서 배우고 가르칠 기회를 얻어야 한다면 그 선교사가 그 괴이한 것들을 이들에게서 배우지 않는 한 동양인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동양인에게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도(道)가 있다. 서양인에게는 새롭고 합리적인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은 서양을 넘어 동양으로 활발하게 전파되어 나간다. 선교사가 동양의 품위와 예절을 따라 행동하려면 최선을 다해 동양인을 대하고 동양인의 기본적인 예절을 배워야만 한다. 야만적인 선교사가 품위 있고 예절 바르게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게일은 서양의 문명을 무조건적으로 이식(移植)하려는 독선적인 태도를 야만(野蠻)에 비유하였다. 그가 맨 처음 서울에 도착하여 장안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로부터 받았을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는 자신이 더욱 철저히 조선인처럼 변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글을 쓴 시점이 조선에 온 지 20년이나 지난 다음에도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외국인들끼리 모여 사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환경에서 빠져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조선 사람을 우리와 같이 되도록 만들려는 어떤 시도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현지인의 문화와 접속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황금률(黃金律·예수가 산상수훈 중에 보인 기독교의 기본적 윤리관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을 말한다)이 자신의 삶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았다는 점에서 게일의 위대성이 보인다. 그러한 이유로 주로 서민들이 모여 세운 연못골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사랑방을 만들어 이곳에서 하루에 일곱 시간을 조선인들과 함께 지내며 일심동체로 살았다.
儆新學校 교장으로 교육 기틀 다져
1906년의 성경번역위원들. 앞줄 왼편이 레이놀즈, 언더우드, 맨 오른편이 게일.
필자는 최근 한국인 아내를 둔 선교사의 후예를 만나 그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형제가 완전히 판이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본다. 한국을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도, 먹고 마시는 음식이 한식일지라도, 아내가 한국인이어서 문화적으로 큰 충돌이 없을지라도, 본인들의 의식은 여전히 미국적으로 행동하고 사는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돈은 이자가 많은 곳으로 몰리듯 생활의 수용성은 의식적으로 편한 곳을 골라 살게 마련이다. 무의식 중에라도 본인이 편하게 여기는 곳에 자신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겨울 폭설이 내린 지방에서 토종 조랑말에 의지해 선교여행을 떠났던 게일이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 절망적인 허우적거림 속에서 동상에 걸렸고 두메산골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때도 있었다. 심지어는 콜레라와 괴질로 고생한 나머지 생명이 위태로운 때도 있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일을 자청한 것도 아닐진대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뿌리치지 않고 견뎌야 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시골 사람들과 맺은 인간관계가 단지 그저 아는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삶을 진하게 나눈 의리와 동질로 무게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일의 서민적 풍모는 그의 삶뿐 아니라 그가 관계했던 교육기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언더우드가 세웠던 경신학교(儆新學校)의 교장이 되어 수년간 기틀을 다졌다. 경신학교는 초기 구세학당(救世學堂)으로 불리었으며 김규식(金奎植)과 안창호(安昌浩) 등 주로 가난한 계층과 고아,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서민들의 자녀가 입학하는 학교였다.
반면 정동에 자리 잡은 감리회의 배재학당은 이승만(李承晩)이나 서재필(徐載弼) 등 문벌이 좋은 집안의 학동들이 수업료를 내고 다니는 소위 문턱이 높은 학교였다. 그러니 게일이 교장을 맡았던 경신학교는 서민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서양 학문과 기독교를 접하는 관문 역할을 한 셈이다.
“개고기 냄새가 좋았다”
이러한 게일의 전통은 게일의 뒤를 이은 민로아(F. S. 밀러) 선교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결국 게일 자신의 삶이 녹아든 이유가 게일이 이 땅의 사람들과 조선을 바라보고 해석한 귀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00년대 초,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개고기였다. 군산과 전주지역의 선교를 개척했던 전킨(W. M. Junkin)은 함께 다니던 언어선생이 이런저런 음식도 먹여 주고 온갖 조선 생활에 적응하도록 훈련을 시켜 주었다. 하지만 시장을 지날 때마다 “몸보신을 해야 한다”며 개고기를 권하는 언어선생의 청을 뿌리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사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개고기를 먹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인들 역시 개머리 뼈를 고아 만든 국물을 아기들에게 먹이면 천연두가 낫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친절한 게일 선생의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여행을 하다 저녁이 되면 주막에 들렀다. 밥상이 들어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 야채. 그중에는 이제껏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개’라고 이름하는 음식도 보였다. 냄새가 좋았다.〉
게일은 개고기를 먹었고, 푹 삭혀서 ‘고약한’ 냄새로 가득한 홍어까지 먹었다. 적어도 선교사가 되려면 개고기에 홍어까지 먹었던 제임스 게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조선을 사랑하되 철저히 사랑했던 사람, 제임스 게일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출처]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월간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