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Hugh Miller (민휴, 閔休) 선교사 (1872-195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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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h Miller (민휴선교사) 에 관한 글

휴 밀러가 증언하는 한국교회 성장의 비밀 한국 선교사역 시작부터 출간된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한 책,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의 비밀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양육 받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백만인구령운동 당시 목포지역 성경반포 준비
-보이는 것은 성경박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밤낮으로 책 중의 책 성경을 읽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너무도 사랑해 그들 대부분은 신약성경을 싸서 그것을 보따리에 넣고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닙니다. 보통 여성들과 소녀들은 자신들의 성경과 찬송가를 허리에 둘러맵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성경의 상당부분을 암송합니다. 지난해 평양의 두 명의 작은 소녀들이 마태복음을 제외하고 신약성경 전체를 암송했으며, 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400구절에서 4000절의 성경구절을 암송했습니다. “백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캐치워드가 서울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서 채택된 후 한국 사람들의 가정과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속히 위치시켜야 할 필요성이 긴박하게 느껴졌습니다.

권서인의 방법은 그 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서위원회가 모여 마가복음 포켓용 특별판을 출간해 보통 가격의 반 값 혹은 한 권 당 한 센트(one sen)에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성경을 제 값에 팔기로 권장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지 않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도매로 반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사랑스런 마음으로 호소하면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성경을 건네주고 그런 후 그가 결신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매일 인격적으로 기도 가운데 돌아보고 전도하도록 권유를 받았습니다. 

한국교회는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이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성서위원회는 마가복음 초판 30만권을 인쇄했습니다. 몇 주 만에 그 모든 성경들이 매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문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주문이 4십만, 5십만, 6십만 권으로 계속 늘어났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성서위원회는 그 나라 전역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마가복음 십 만권을 요코하마에서 서울까지 증기선 대신 기차로 발송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5개월 안에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영혼 구령에 사용하기 위해 이들 복음서를 50만권이나 구입했습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사역은 영국성서공회와 미국 성서공회의 지도 하에 수행되고 있습니다.

미국 성서공회 책임자는 벙커(D. A. Bunker)인데 그는 성서공회 사역과 관련된 자신의 업무에 추가하여 광범위한 복음전도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에서 사역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인들이지만 영국성서공회는 그 선교지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성경인쇄반포 사역의 주된 부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영국성서공회의 책임자는 휴 밀러(Hugh Miller)씨로 그의 능률적인 행정 하에 한국에서의 성경 사역이 지난 수년 동안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그 사역이 너무 증가하여 베시(F. G. Vesey)가 최근에 부 책임자로 임명받았습니다.

1910, George T. B. Davis, KOREA FOR CHRIST 번역: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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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 4:13-14).
스스로 귀족집단이자 지도자 집단이라고 자부하는 사두개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공식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또 5천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또 태어나면서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온전히 치료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들을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영혼을 사랑하는 불같은 마음이 있으면, 어떤 모습으로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섬기려는 절실한 마음이 있으면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 G. Grierson, 의사, 한국명 구례선, 1868-1965)이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리어슨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도 자네와 같이 한국에 갈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나. 나처럼 학위도 없는 사람은 엄두도 못 내지. 자네가 한국에 가거든 나 같은 녀석에게도 허락되는 일거리를 발견하면 불러 주게. 빵과 버터만 벌 수 있다면 내가 가서 자네가 하는 선교일을 도와줌세.” 그리어슨은 그러겠노라고 약속은 했지만 빵과 버터만 제공되면 무슨 일이든 돕겠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어슨이 서울에 도착하여 언더우드 박사를 만났을 때 언더우드 박사는 ‘자신을 돕는 비서가 필요하며, 열심과 희생정신이 있는 신자로, 빵과 버터만 해결해 주면 되는 그런 사람을 구했으면’ 했습니다. 그리어슨은 자기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어슨은 곧 캐나다의 친구에게 연락하였고, 그 친구는 자기가 일하던 상점을 그만두고 몇 달 동안 속기 기술을 익혀 1889년 서울에 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언더우드 밑에서 일을 하다가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서울에 있는 <성서공회>의 일을 맡게 되었고, 간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평생토록 ‘성서편찬사업’에 이바지했습니다. 성서공회는 한국 선교사업 중 가장 훌륭한 형태의 사업이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사는 외국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의 중요성 때문에 어느 선교사보다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닏. 마침내 이화 학당에서 일하던 여선교사와 결혼하여 아들 둘도 얻었습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대단한 일을 할 수 없는 자처럼 여겨졌던 그였습니다. 빵과 버터만 있어도 하나님이 맡기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만족했던 그를 하나님은 존귀히 여기셨습니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사에 ‘민휴(閔休)’로 널리 알려진 ‘밀러(Hugh Miller) 선교사’입니다.
빵과 버터만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기쁘게 하고 싶으십니까? 설교할 강단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부족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이 아닐지라도 주님의 일이라면 기꺼이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조향록목사 수필

1957년 9월, 내가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하여 한 달쯤 지났을 때이다. 나는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짧은 기간이나마 영어 실력을 키우려고 한국에 와서 평생 봉사하시다가 은퇴 후 귀국하여 토론토에 살고 계신 선교사 구례선 박사님 댁에 가서 매일 영어 공부를 했다. 사모님은 교육자 출신이어서 매우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그 어느 날 점심 때가 지난 오후 전보 한 통이 구 박사님께 배달되어 왔다. 전보를 받아들고 들어오신 구 박사님은 내게 이 전보는 미국 워싱턴 디씨에 사시던 내 친구 휴 밀러씨가 별세했다는 부고라 했다. 휴 밀러씨는 90세도 많이 넘은 자기의 친구라 했다. 그때 구례선 박사님도 90세가 넘으셨는데도 매우 정정하셨다.그는 내게 친구 휴 밀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는 자기와 함께 10대 소년 시절에 고국인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동부 노바 스코시아 주 파인힐에 이민을 왔던 친구라 했다. 자기는 미국 펜실바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무디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큰 감동을 받고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 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한 후 3년 간 파인힐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캐나다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됐다고 했다.한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 선교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협의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과 그것을 책자로 출판하여 반포하는 문제였다 했다.성서공회를 창설할 것, 그리고 성서 번역자를 선정하는 일 등 중요한 일들을 대강 결정한 다음 번역 원고 수집, 번역자들과의 연락, 위원회 소집 통보, 사무실 청소 등 잡역을 담당할 일꾼 한 사람이 꼭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들 안에는 그런 일을 맡을 일꾼도 없었거니와 또 그에게 지불할 약간의 급료도 구할 수 없었다. 그 문제로 걱정하며 그 모임에서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한다. 자기를 한국 선교사로 전송하는 축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처럼 친구 휴 밀러씨가 그와 동행했다. 함께 오던 중 밀러씨는 자기의 손을 꼭 잡고 \”그례션! 자네는 공부도 많이 했고 한국 선교사로 가게 됐으니 나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환송 예배 때 뒷 자리에 앉아 울기만 했다네. 나는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잡화 짐을 지고 해변가 섬마을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풍랑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나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나는 평생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봉사하겠습니다\’라고 다급한 맹세를 했다네. 그런데 여기에 와서 구멍가게를 차려놓고 겨우 먹고나 살고 있으니 하나님이 \’네 이놈, 그때 맹세는 어디다 두었느냐?\’싶어 늘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다네. 나는 공부도 못했고 선교사로 봉사할 자격이 없으니 그것을 바랄 수도 없네. 자네가 한국에 가거든 심부름꾼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나를 기억해두게. 나는 하루에 빵 두세 덩이와 커피 두 잔이면 그것으로 만족하네. 어떤 심부름이라도 하나님의 사업을 돕는 일이면 만족하겠네.\”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러면 그 사람을 데려오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휴 밀러는 그렇게 해서 한국에 왔던 분이다. 그가 한국에 와서 1년쯤 됐을 때 미국인 여자 선교사와 애정 관계가 맺어져서 그 벌로 6개월 간 정직 처분을 받았고 그 기간은 자기 집에 식구로 함께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복직되어 한국성서공회 잡역부 역할로 일생을 바쳐 일하고 정년 은퇴하여 귀국 후 워싱톤 디씨에 살다가 지금 가셨다는 전보라 했다.휴 밀러, 그의 한국 이름은 민휴(閔休)씨다. 한국어 성경이 발간된 후 상당 기간 성경책 맨 마지막 페이지에 발행인 민휴씨 이름이 있었다. 약간 큰 활자로 인쇄되어 그의 이름이 쉽게 돋보인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보게 되는 민휴 씨를 잘 알고 있었다. 성서 발행인이니 신학박사는 물론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당연히 조예가 깊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민휴 씨는 한국 민씨 가문 출신학자인가 라고 생각했고 미국인임을 알고서도 큰 학자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다.한국 기독교의 복음 전파가 한글판 성서 간행과 그 반포가 끼친 지대한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한글이 국어로 정착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한글판 성서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는 온 국민이 다 알고 치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지대한 사업을 시작하여 성서 번역 출판 반포 등 일체를 총괄한 한글판 성서 발행인 민휴씨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 수 있는 글도 말도 나는 그 이전에 들어본 일이 없었다.스코틀랜드 출신 장돌뱅이 잡화장수의 아들, 가난하여 학교 공부도 제대로 다 마치지 못한 젊은 청년이 배가 뒤집혀 죽을 위기에 \”하나님,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일꾼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의 간절한 기도, 하루에 빵 두세 덩이와 커피 두 잔만 주면 무슨 잡역도 하나님의 일이라면 감지덕지 일하겠다던 바닥 노동자, 그가 한국성서공회의 초대 발행인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민족으로서도 그대로 묻어둘 수 없는 사화(史話)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던 어부를 불러 교회의 초석을 삼으셨던 예수의 인재 등용의 비결이 그때만의 일이라 말할 수 없다.한국성서공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그의 무덤을 찾아 우리의 고마운 뜻을 한 다발 꽃에 담아 그 앞에 드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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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국어에 미친 영향김윤경 <문학박사 연세대학교 문리대 교수>

    3. 성경 번역의 시작과 완성

나는 성경의 번역과 그것이 국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피어 보기 위하여 그 배경이 되는 그리스도교가 전하여 들어 온 내력을 좀 소개하려던 것이 탈선적이라 느낄만치 좀 지리하게 적은 것 같다.이제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함으로부터 완성되기에 이른 경로를 좀 살피어 보려한다.신약 경경의 번역 시작은 멀리 고종 12년(서기 1875)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회 선교사 쬰 로쓰(John Ross) 목사는 봉천(奉天)에 머물면서 조선 상인들을 접촉하게 되어 조선 사람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조선 사람은 서양 사람들과 어떠한 교제도 가지기를 싫어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로쓰박사는 우장(牛莊, Newchwang) 항구로부터 조선 국경(그는 “The Gate of Korea”라 하였는데 아마 의주를 가리킴이리라고 보는 곳)까지 긴 여행을 하였다. 그는 조선말을 좀 배우려고 어학 선생을 구하려 하였으나 조선 사람들의 강한 의구심은 이 뜻을 이루기 어렵게 하였다.

로쓰목사는 우장으로 돌아 갔다가 다음해(서기 1874)에 다시 와서는 한국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학 교사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얻게 되었다. 그 교사의 도움으로 로쓰목사와 동무tus고사 쬰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목사는 누가복음을 한국말로 번역하였다. 이 한국말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었다. 그는 새 신앙을 한국에 들여 왔으며 노래의 자기 이웃 사람들과 자기 형제 서경조(徐景祚)를 개종시킨 사람이었다. 서경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임명된 장로 교회의 7 목사의 하나다.고종 광무 2년(서기 1898)에 소래에 교회가 서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 첫 교회다. 번역한 누가복음을 인쇄하려고 만주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로쓰박사는 한글활자를 설계하여 일본에서 주조하였다. 식자공을 얻기 곤난하였으나 지원하는 매약 행상인 한국인을 식자공으로 고용하였다. 그는 복음을 식자하는 동안 그리스도 교의 근본적 진리를 배워서 신자가 되었다. 그 뒤 북경가는 한국의 연례(年例) 특사에 따라 가는 또 한 청년이 가입되어 숙련한 식자공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누가복음이 인쇄되자 로쓰 목사는 매약 행상자를 종교책 행상인으로 삼아 동부 만주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보내었다. 여섯달 뒤에 그는 돌아와서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보고하면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함께 가자고 선교사에게 권고하였다. 로쓰는 가지 않았으나 그 행상인은 두 번째 가서 여섯 달 뒤에 돌아와서 전과 같은 용기를 북돋는 보고를 하였다. 1884년 겨울에 로쓰 목사와 그의 동무 선교사들은 만주 동북부 한국인 부락을 찾는 어려운 여행을 하였다. 네 부락을 찾아 75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더 기다리기로 한 명부를 만들었다. 세례받은 이들은 다 농부들이요, 가족의 어른들이었다. 로쓰는 이에 감동되어 새 책들을 번역함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도 그 선교사들은 두 번째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중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련다고 오해하여 한국인 신자들을 박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영국과 외국 성서공회는 전도를 계속하여 복음의 씨는 그 지방에 보존될 뿐 아니라 더 널리 전파되었다.1883년에는 요한복음이 한국말로 인쇄되었다.

누가복음과 같이 요한복음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경비로 각각 삼천권씩 인쇄되었다. 이 책들을 만주에는 전파하기 그리 큰 난관이 없었으나 한국안으로 이책을 들이어 오기는 참으로 난관이 컸다. 이는 그 때 한국이 외국 서적 수입이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만주 봉천에 정긱적으로 왕래하면서 관용(官用) 고지(古紙)를 무역하여 등짐군에게 지워 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로쓰와 마긴타이어 두 선교사는 인쇄한 복음을 제본하지 않고 한국 상인들의 고지 뭉치속에 싸아 넣어 보내었다. 이것이 한글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최초라하여 기억할만한 일이다.또 두 복음 인쇄의 활자는 이미 말한 대로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부에서 준비하여 보낸 것이었으므로 이 복음들이 인쇄되자 전부의 삼분의 일을 일본의 대리부로 보내었다. 이는 그 나라에서 한국에 소개될 수 있도록 함이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대리자 일본 사람 신자 나가사까는 고종 20년(서기 1883) 6월에 부산에 와서 성경을 나누너 주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다. 한문과 일본말의 성경과 한국말의 복음과 종교 서적들이었다.

또 요꼬하마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대표자 톰손(J. Austin Thomson)은 그의 부인과 일본 사람 신자 미우라와 스가노와 그 부인들과 함께 고종 21년(서기 1884) 4월에 부산에 왔다. 미우라와 스가노는 부산에 머물면서 그 공회의 대리자로서 성서 행상자로 활동하였다. 톰손 부부는 다음해(1885년) 6월에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하고 그 때에는 멀리 북쪽 서울까지 와서 새로 온 미국 선교사들도 만났다. 부산에 와 있던 스가노는 고종 26년(서기 1889)에 부산에서 죽고 미우라는 동시에 해고(解雇)되었다.영국 성서공회는 1882년(고종 19)에 한국에 그 사업을 시작하여 로쓰의 신약전서 번역을 출판하기로 계획하였다. 봉천의 로쓰 목사 감독 밑에 한국에 성서를 전파하던 서상륜도 그 공회가 계속하여 일하게 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영국 성서공회가 한국의 성서 사업을 넘기어 맡게 되어 북부 중국 지부의 총무 부라얀(Rev. Evan Bryant) 목사가 그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의 감독 밑에 로쓰의 누가, 요한 두 복음을 다시 번역하고 마태, 마가 두 복음과 사도행전을 새로 번역하여 1884년(고종 21)에 네 복음과 로쓰 번역의 사도행전을 인쇄하였다.

신약전서 번역이 완성될 때는 5천권의 출판권을 가지게 되었다. 로쓰의 번역인 “예수 셩교 젼셔”(=신약전서)는 1887년(고종 24)에 출판되었다.(그 영인본을 이제 성서공회에서 팔고 있다.) 서상륜은 고종 20년(서기 1883)에 한문 신약전서와 새로 박은 한국말 복음들을 가지고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때 천신만고로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서울까지 이르렀다. 그는 고종 23(서기 1886)까지 15,690권을 전파하였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즉시로 수 십명에게 세례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노력의 결과로 된 것이다.이와 같이 영국 선교회는 북쪽 중국과 만주와 남쪽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게 되었거니와 미국 선교회도 남쪽 일본으로부터 한국 선교에 손을 대게 되었다. 1884년(교육 21)에 미국 성서공회 총무로 일본 요꼬하마(橫濱)에 와 있던 누미쓰(Rev. Henry Loomis) 목사가 1884년(고종 21)에 한국인으로서 거기 머물던 이수정(李壽禎)을 청하여 마가복음을 한국글로 번역하게 하여 출판하였다.

이 복음은 한미 조약이 맺어진(고정 19, 서기 1882) 뒤 처음으로 미국에서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Underwood)목사와 아펜셀러(Appenzeller)목사가(고종 22년 서기 1885) 한국으로 들어올 때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서울에서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서 도와 준 이는 서상륜이었다. 처음의 불완전한 번역이 출판된 뒤로 영국 성서공회는 한국말 성경 19,000,00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고종 24년(서기 1887)에 한국의 상설 「성경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언더우드(H. G. Underwood)목사, 스크란톤(W. B. Scranton M. D.)의사, 아펜셀러(H. G. Appenzeller)목사, 헤론(J. W. Heron M. D.)의사, 앨른(H. N. Allen, M. D.)의사들로 구성된 것이다. 고종 32년(서기 1895)에 영국 성서공회 주재 대표 켄뮤어(Alexander Kenmure)의 제의로 성경 위원회의 조직이 개정되어 번역 사무국이 구성되었다. 지정된 번역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란톤, 트롤로프(M. N. Trollope)(나중에 한국의 감독이 된), 께일(J. S. Gale)의 다섯 사람이었다. 두 해 뒤에 레이놀쓰(Rev. W. D. Reynolds) 목사가 추가되었다. 광무(光武) 9년(서기 1899)부터 신약전서의 두어 부분이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인쇄되었다. 또 요구에 따라 네 복음과 사도행전을 한 권으로 합본하여 보급시키게 되었다. 번역국에서는 구약전서 번역을 시작하여 시편을 먼저 택하였으나 그 책이 끝나기 전에 다섯 위원 중에 네 위원이 안식년이 된 때문에 거진 두 해 동안이나 정규로 모이지 못하였었다.

광무 4년(서기 1900) 여름에 신약전서 전체의 시안의 번역이 끝났다. 서울 제일 감리교 예배당(First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이를 위한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서기 1901)에 이 신약전서의 번역이 출판되었고 광무 8년(서기 1904)에 고정한 판이 나고 또 광무 10년(서기 1906)에 더 교정한 판이 나게 되었다.광무 6년(서기 1902) 3월에 번역 위원 아펜셀러와 께일, 레이놀쓰들이 목포에서 정규 위원회로 모이게 되었는데(벨과 오웬쓰의 안식년으로 흠석되는 동안) 여름에 다시 거기서 모이기로 하였었다. 께일 목사와 그의 조수는 예정 시간대로 목포에 갔으나 아펜셀라 목사는 감리교회의 무어(David Moore) 감독을 인도하여 주느라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수일 뒤에 조수와 함께 해안에 다니는 기선을 타고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게 되었다. 그 밤에 빽빽한 안개로 그 기선은 오는 배와 마주치게 되어 갑판 위에 있던 모든 승객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성경 번역에 바친 희생이었다. 쫀쓰(Rev. G. H. Jones) 목사가 아펜셀라 목사의 후임이 되어 여섯 달 동안 일을 보았다. 다행히 이 때에 언더우드, 께일 두 위원이 그 소속 선교회로부터 번역하는 일에 전 시간을 다 쓰도록 허락되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의 수정이 두 해 동안에 끝나게 되고 광무 8년(서기 1904)에 이것이 출판되게 되었던 것이다.번역 위원회는 이제 구약전서의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언더우드 박사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수년동안 거기서 머물지 않을 수 없이 되었고 께일 박사도 이 때 안식년으로 일을 못 보게 되었으므로 레이놀쓰 박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한국사람 조수를 채용하였다. 광무 10년(서기 1906) 가을에 크램(Rev. W. G. Cram), 피터(Rev. A. A. Pieters) 두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나 다른 일들 때문에 번역 사업에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광무 11년(서기 1907) 봄에 영국 성서공회의 릿손 박사(Dr. Ritson)와 미국 성서공회의 팍쓰 박사(Dr. Fox)가 한국을 방문하고 성경 위원과 의논한 뒤에 레이놀쓰 박사와 두 한국인 위원 김정삼과 이승두에게 구약전서 번역을 추진하라고 허락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거진 전부가 이 세 사람의 일이었다. 그들은 충실히 일하여서 그 일이 시작된 지 13년 뒤 전주시에서 융희 4년(서기 1910) 4월 2일에 그 사업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서기 1911)에 구약전서가 출판되었다.그러나 서양 사상이 흘러 들어옴으로 말미암은 말의 급격한 발달과 변화는 성경의 근본적 번역의 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일반의 의견은 이미 개정한 신약전서보다 구약전서의 개정이 더 필요하다함이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 께일, 레이놀쓰 목사들로 구약전서 개정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레이놀쓰 목사는 이미 많은 시간을 번역 사업에 바치었고 다른 일이 많다고 사면하였다. 그리하여 몇 해 동안은 번역 사업이 간흘적으로 진행되었었다. 1917년에 스톡쓰(Rev. M. B. Stokes)와 케블(Rev. E. M. Cable) 두 목사가 추가 번역 위원으로 뽑히었으나 스톡쓰 목사는 일을 볼 수 없었다. 1920년에 엔겔(Rev. G. Engel)과 어드맨(Rev. W. C. Erdman) 두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추가되었으나 어드맨 목사는 그 다음 해에 사면하였다. 1922년에 하디(Rev. R. A. Hardie)목사와 빼아드(Rev. R. A. Baird) 목사가 뽑히었고 그 다음해에 클락(Rev. W. M. Clark)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뽑히었다. 1923년에 께일 박사가 그만두고 1924년에 클락 목사가 사퇴하였다. 1926년에 피터(Rev. A. A. Pieters) 목사와 남궁혁(南宮爀), 김인준들이 번역 위원으로 추가되었다. 이러한 위원의 시기적 변동은 번역 사업에 많이 방해를 끼치었다. 다만 레이놀쓰와 엔겔, 빼아드들로 이룬 평양 위원부가 자주 모일 수 있었다.

장질부사 병으로 인한 빼아드 박사의 죽음(1931년 11월 28일)은 평양 위원부가 일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서울 위원부까지도 원고 통과에 필요한 세 사람의 출석이 불가능하게 하였다.피터 목사는 구약전서의 모든 남은 책들의 교정을 끝내었다. 성경 위원회는 이 책들을 검사하게 하기 위하여 구약전서 교정 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원모를 임명하였다. 또 1935년부터 1936년 동안 그와 레이놀쓰 박사, 피터 목사들은 서울에서, 지리산에서, 평양에서 정규적으로 모이었다. 이 같이 하여 1936년 봄에 구약전서의 개정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정 사업이 25년 이상에 걸치어 되었음으로 인하여 성경 위원회는 형식의 통일과 더 정확하기 위하여 이원모와 피터 위원으로 하여금 빼아드 박사가 죽기 전에 된 책들을 다시 한번 교정할 필요를 느끼었다. 그리하여 각 책을 엄밀히 읽고 필요한 수정을 더하였다. 그러한 뒤에 그 원고를 레이놀쓰 박사에게 보내어 그의 의견을 듣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을 계속하여 1937년 여름에 구약전서의 마지막 교정이 끝나게 되었다.신약전서의 개정은 더 빨랐다. 이 일이 시작된 것은 1926년이었는데 그 때 교정 위원은 스톡쓰와 윈(Rev. S. D. Winn), 커닝함(Rev. F. W. Cunningham), 로쓰(Rev. C. Ross)들이었다. 두 해 뒤에 로쓰는 그만 두었다. 1930년에 크레인(Rev. J. C. Crane D. D.)과 남궁혁을 위원으로 더 넣게 되고 뒤에 빼아드 2세(Rev. W. M. Baird Jr.)를 더하였다. 이 위원회는 서울 혹은 평양, 여름이면 원산 해변, 혹은 지리산에 모임으로 말미암아 1937년에 끝나게 되었다.

이 전 성경의 개정 번역본은 1938년에 인쇄되어 나아오게 되었다.여러 가지 난관(안식년, 질병, 죽음)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신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7년반에, 구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5년 반에 완성되었다. 구약전서의 개정은 처음 번역보다 매우 오래 걸리어 거진 26년에 걸치게 되었다. 이는 처음 번역 때 경험한 곤난보다 더 심한 곤나너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약전서의 개정도 그 처음 번역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어 거진 11년에 걸치게 되었다. 이와같이 번역과 개정에 거진 50년이나 걸리어 출판된 것이다.(1938년 5월 “The Korean Mission Field” 제 34권 제5호에 실림 신학박사 이.엠.케블 목사의 ”The Present Version”에서)그리고 단기 4285(서기 1952)년에는 한글학회 제정의 맞춤법으로 고친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다.동경 지진 전까지는 한국말 성경의 인쇄나 제본이 다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회사에서 맡아하게 되었었다. 서울에도 인쇄소가 있었으나 일을 맡기어 본 결과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동경 지진은 지형과 동판, 인쇄된 책들(30,725원어치)의 저장을 완전히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우리를 만족하게 하여 주던 인쇄회사까지도 파괴되어 버리었다.

영국에서 인쇄술을 공부한 그 복은 인쇄소의 젊은 주인 무라오까도 죽어서 우리의 일을 맡을 수 없이 되었으므로 비능률적이나마 서울에 있는 인쇄소에 일을 맡길 수 밖에 없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인쇄술도 전보다 개량되어 마침내 일본에서 하던 것에 견주어 손색이 없이 되었다. 1932년까지도 가장 좋은 가죽 의(皮衣) 제본의 일은 일본에서 하여 왔다. 그 뒤의 이 지방의 일본 사람 인쇄회사가 일본에서 그 직업을 배운 한국 사람을 고용하여 이 제본을 맡아하게 되어 매우 나은 기술을 보이어 주게 되었으므로 서울 밖의 회사에 인쇄나 제본을 맡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1937년 6월에 런던에 있는 영국 성서공회 출판 감독자 코완(G. Cowan)은 서울에 있는 영국 성서공회 총무 민휴(閔休, Hu호 Miller)에게 “여러 나라에서 우리에게 온 책들보다 한국 사람의 인쇄와 제본의 기술이 매우 자랑할만치 낫다”고 글을 쓴 일이 있었다.또 사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의 여섯 권이 장님(盲人)을 위하여 점자(Braille type)로 출판되고 신약전서의 나머지도 점차로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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