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호머 헐버트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이 말은 그의 유언으로,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쓰여 있다. 지금이나 당시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나 묻힐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로운 장소로 꼽힌다.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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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3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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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년 8월 5일 (8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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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 노환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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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다트머스 대학교 |
직업 |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항일운동가 |
종교 | 감리교 |
배우자 | 메이 헐버트 |
자녀 | 3남 2녀 |
웹사이트 | (http://www.hulbert.or.kr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배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필요]
생애
초년기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매리 우드워드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1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헐버트는 1891년 여름 당나귀를 타고 아펜젤러, 모펫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근교의 석탄 광산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아펜젤러와 모펫은 선교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1]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한국독립운동 지원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저서〈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저서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3]
상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
▲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 100주년기념관 가는 길
때는 1886년 7월 4일, 인천 제물포항에 어느 한 미국인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이름은 호머 헐버트.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습니다. 고종 황제께서 영어 및 서양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던 육영공원 (Royal English School)의 교사로 우리나라를 찾은 호머 헐버트. 이 젊은 외국인 청년은 후에 호머 헐버트 박사라 불리며 우리 민족의 많은 존경을 얻게 됩니다. 올해는 호머 헐버트 박사가 서거한지 63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 호머 헐버트 박사의 사진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매우 가치있게 여겼던 호머 헐버트 박사,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여 한글 사용을 주장하였습니다. 박사의 제자인 주시경 선생과 함께 띄어쓰기를 강조하였고, 서재필 박사를 도와 우리나라 최초 한글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을 도와 영문판 주필을 담당하였습니다. 한성사범학교와 관림중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리나라의 한글 보급과 근대교육에 앞장섰습니다.
▲ 헐버트 박사 추모식 현장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한 헐버트 박사 추모식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내 100주년기념관에서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등 여러 단체에서 후원을 하였습니다. 사단법인 헐버트박사 기념 사업회 김동진 회장의 식사를 시작으로 각 단체장의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 헐버트 박사에게 헌화하고 있는 모습
“선생께서 가신 지 63년, 저 도도히 흐르는 한강물과 함께 고귀한 넋이 되어 양화진 언덕에서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의 추모사는 참석한 이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왔습니다. 추모사 이후에는 서울경찰악대의 아리랑 연주가 있었는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아리랑과는 다른 음이었습니다. 고종 황제가 구두로 부르던 아리랑에 음을 입혀 작곡을 해 음악으로 탄생시킨 이가 바로 헐버트 박사입니다.
헐버트 박사는 아리랑과 한국 전통 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1896년 박사가 저술한 『한국의 소리 음악 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번역하여 발간하였는데요. 박사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제보하였으며, 이 논문 번역본을 통해 우리 음악인 아리랑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헐버트박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당시 여순 감옥에서 일본 사까이 경시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 박사에 대하여 1909년 12월 2일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습니다.
▲ 안중근 의사가 헐버트 박사에 대해 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 (원본 발굴)
“이토 히로부미가 혹독한 정략을 쓰고도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을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안중근 의사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매우 높게 평하였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독립 운동에도 매진하였는데,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 헐버트 박사 소장 고종황제 탄신 50주년(1901년) 기념 은장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는 특사로 임명되었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도와 일본의 부당성을 세계 각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요? 박사는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추방된 이후에도 뉴욕타임스 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 1949년 한국 방문 때 헐버트 박사가 지니고 있던 여권
미국으로 추방된 지 40여년 만인 1949년, 해방된 우리나라에 다시 찾아온 헐버트 박사는 국민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 86세의 노구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여독으로 박사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서거하였고, 서거 후 1949년 8월 11일 서울시청 옆 부민관에서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 땅에 묻힘으로써, 평소 소망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헐버트 박사,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다.
▲ 헐버트박사 서거 63주기 추모영상
이번 헐버트 박사 서거 63주기 추모식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했습니다. 박사의 모교인 다트머스(Dartmouth) 대학에 재학 중인 전범선 학생은 편지 낭독을 통해 박사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했습니다. 이어 신길고교 이푸름 학생은 자신이 직접 그린 헐버트 박사의 초상화를 협회에 기증했습니다.
▲ 편지를 낭독하는 정범선 학생과 초상화 기증하고 있는 이푸름 학생
두 학생의 경우, 헐버트 박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박사가 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박사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합니다. 박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 기성세대를 지나 젊은 세대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광복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귀감도 되었고요.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본받아 다가오는 8·15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출처: http://mpva.tistory.com/1860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