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12 스코필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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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의 삶을 산 우리의 벗 스코필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이 문 한
저명한 수의학자이며 기독교 선교사였던 Frank W. Schofield 박사는 한일합방과 일제의 무단정치에 항거하
여 3·1 독립운동을 일으킨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34인으로 불린다. 이러한 연유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
민국 문화훈장과 건국공로훈장(국민장)을 받았고, 지금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들
어 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실로 파란만장하였으나 우리나라와 한국인을 더 없이 사랑하였고, 세계 수의학계에
미친 영향은 숭고하고 지대하다.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주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Frank
를 낳고 산욕열로 사망하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신약성서와 희랍어를 강의하는 독실한 기
독교 신자였다. 집안의 형편이 나빠 스스로 돈을 벌어대학에 진학할 뜻으로 농장과 목장 등에서 일을 시작한
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대학에 진할 만큼의 돈을 벌 수 없었다. 1907년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캐나다의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벌게 되었고, Toronto대학교(현 Guelph대학교) Ontario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방학 중에는 목장에서 일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조달하였고, 몇 조각의 빵과 말린 물고기기만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 노력에 힘입어 장학생으로 선정되고,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러나 음습한 지하실 셋방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과로한 탓에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린다. 그 후 그는 왼팔과 오른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졸업 후 Ontario주 보건국 세균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Toronto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 논문으로 1911년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의 나이 24세인 1913년에 Alice와 결혼한다. 그 이듬해에 Ontario수의과대학세균학 교수로 부임한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 불편한 몸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 하던 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Avison 박사의 초청으로 1916년 아내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먼 이국 땅 조선에서의 부름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캐나다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한 채 서울에 온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는데,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아내는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1여년만에 만삭의 몸으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혼자 남아 선교사업에 전념하면서 그 일환으로 영어 성경반을 운영한다. 그는 성경반에 참석한 젊은이에게 성경의 말씀에 따라 의롭고 정직한 삶 을 살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어 다른 성경반 보다 인기가 좋았다.
일제 무단정치의 만행과 한국의 후진성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재 선생과 최초의 사설학원 정화학교 설립자인 김정혜 여사를 존경하고 두터운 친분을 쌓는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김정혜 여사를 수양어머니로 삼는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선언을 선포하 였다. 이 무렵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옹의 부탁으로 독립운동 준비에 동참하게 된다. 그가 맡은 일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이였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모습, 그리고 이들 시위자에 대한 일경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해 4월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제암리 양민 학살사건과 민가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사진기와 자전거를 챙겨 열차로 수원역에 당도한다. 이 만행이 해외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경의 검문이 강화되자 제암리와는 다른 방향인 원천(병점으로 추정)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려 일경을 따돌리고, 논두렁과 비탈길을 따라 정남면 문학리, 발안을 거쳐 제암리에 도착한다. 소아마비로 한쪽 발을 쓸 수 없어 외발로만 자전거를 몰아 100리길을 갔으니 그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그는 불타버린 제암리교회, 제암리와 수촌리 일대의 민가, 그리고 집을 읽고 넋을 잃은 노인네와 어린이의 모습을 촬영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암리/수촌리 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지에 서대문형무소를 홍보하는 글이 실렸다. 수감자는 주기적으로 운동과 목욕을 할 수 있고, 성경을 비롯한 책의 반입이 가능하며, 기술을 익혀출감 후에는 훌륭한 기술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서대문형무소의 재소자에 대한 잔학 행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그는 곧 바로 이를 면박하는 글을 이 신문에 올리자 직접 현장을 확인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3·1 독립 운동에 연루되어 수감 중인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을 면회하여 격려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일제는 이와 같은 스코필드의행위를 막고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압력을 가하자, 학교 당국은 조선 독립에 대한 활동을 자제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그는 1919년 9월 일본에서 열린 ‘극동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일경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만행과 한국의 실정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린다. 그리고 총리 하라와 정계인사를 만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를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주모자인 간부들을 대구형무소에 수감한다. 수감된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재무부장 장선희, 그리고 적십자부장 이정숙은 스코필드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순박한 한국 여성들의 대담함을 본 그는 대구형무소를 찾아 고문에 시달린 이들을 면회하고, 사이또 총독을 만나 수감자에대한 고문행위를 힐책하고 처우개선을 요구한다.
세브란스 의전과의 4년 계약도 한학기만 지나면 끝나는 1920년 4월,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마지막 학기 동안 후임 교수를 위하여 강의 교재와 실험기구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동안 사귀던 한국인 친지를 일일이 만나 작별인사를 한다. 사이또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도 만나 한국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3·1운동 때 목격한 바를 298매 분량의 영문타자 원고
지에 기록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의 사본을 만든다. 세브란스병원 지하실 바닥에 이 사본을 묻고, 그 원본과 3·1운동 때 찍은 사진은 일경의 검색을 피해 캐나다로 가지고 간다. 캐나다와 미국의 신문, 잡지 등에 한국의 실상을 소개한다. ‘끌 수 없는 불꽃’을 출판하기 위하여 영국의 출판사와 접촉한다.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한 출판사들이 출판을 거절한다. 워싱턴의 이승만박사를 만나 뉴욕의 한 출판사를 소개받는다. 그러나 이 출판사도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1921년부터 Toronto병원에서 근무하게 되고 곧 Ontario수의과대학에 복직하여 67세까지 계속 이 대학과 병원에서 근무한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 Alice는 실성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랴, 네 살 난 아들 Frank Junior를 혼자 양육하면서 매우 힘든 생활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월급의 1/3을 떼어 10년 계획으로 한국에 갈 비용을 마련하기로 한다. 이런 사정을 안 친구들의 도움으로 귀국 6년 만에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여 1926년 5월 23일 서울에 도착한다. 도착 소식과 환영행사 등이 동아일보에 상세히 보도된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갑성, 이상재,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오긍선 등을 만난다. 그리고 3·1독림운동과 애국부인회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 사면된 애국지사들을 만나 위로한다. 그는 서울, 평양, 함흥을 둘러 북경을 거쳐 캐나다로 떠난다.
그의 나이 67세 되던 1955년 건강상의 문제로 Ontario수의과대학을 그만두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빈으로 그를 초청한다. 1957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장성하여 민간 항공 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한국으로 갈 뜻을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식전에 국빈으로 그를 초빙하여 8월 14일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한다.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이어 식전에 참석한다.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의젓한 독립국가로 변신한 대한민국이 그리고 목숨을 걸고 싸운 젊은이들의 기상이 대견하고 기뻤다. 8월 17일에는 이기붕 국회 의장을 예방한다. 당시 한국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경제는 피폐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와 상이군인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척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독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한다. 물론 이승만과 이기붕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그는 그해 8월 20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방문하고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윤일선 총장은 수의과대학 이영소 교수의 건의를 받아드려 숙소를 주선하고 외국인 교수로 위촉한다,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하면서 연세대 의대와 중앙대 약대에 출강한다. 그해 8월말 그는 제자를 만나기 위해 대구를 방문한다. 열차에서 몸이 불편한 그를 돕겠다는 가짜군인의 호의에 가방을 맡겠다가 날치기 당한다. 그 가방 속에는 3․1운동을 기록한 사진 25장이 들어 있었다. 9월 초그의 옛 친구인 이갑성, 백낙준, 윤일선, 이선근, 임용신, 신봉조 등이 주선한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에 참석한다. 이화여자중고등학교 노천극장에서 서울시내 남녀학생 대표와 정부 고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환영회 답사에서 그는 한국을 전에 못지않게 사랑할 것을 약속하고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을 발전시킬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경향신문에 실린 한국 국민의 환대에 감사하는 편지를 통해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기를 당부한다.
그는 영어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50여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도왔으며, 유학을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외국 대학의 장학금을 주선해준다. 당시 어윤희가 운영하는 유린보육원과 이경지가 운영하는 봉은보육원에서는 전쟁고아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사비로 이들 보육원을 지원하는데 한계를 느껴, 캐나다, 미국, 유럽의 수의사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호소하여 지원을 받는다. 1958년 말 언론탄압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 민심혹란죄 등이 포함된 국가보안법을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야당 위원을 의사당 밖으로 끌어낸 후 3분 만에 통과시킨 ‘2·4 정치파동’이 일어난다. 그는 이듬해 정초 한국일보에 언론 자유의 침해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사실에 대하여 우려하는 글을 써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그는 1959년 5월 초 캐나다로 가 가재를 정리하고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캐나다와 유럽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을 설립하고 그 사무실을 미국의 Kansas시에 있는 월간잡지 ‘Veterinary Medicine’ 본사에 둔다. 이 잡지를 통하여 그가 한국에서 벌리는 사업이 소개됨으로써 친구들에게 손수
일일이 편지를 보내는 수고를 덜 수 있었고, 도움도 크게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당시 스코필드는 봉은보육원, 유린보육원과 흥국직업소년학교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서울사대부고 학생, 토요일 저녁에는 숙명여고 학생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합동반이라 하여 시내 각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신약선경반(Bible Class)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에게는 학비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 당시 경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근태(전 복지부장관), 정운찬(전 총리), 이준구(서울대 사회대 교수), 김희준(서울대 자연대 교수) 그리고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삼열(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이 선경반 회원이었다. 특히 정운찬은 경기중학교 시절부터 스코필드의 도움으로 대학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2‧4 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자, 4월 신학기 강의를 중지시키고 그가 거처하고 있는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정권이 들어서자 그해 4월 28일자 Korean Republic에 3‧1독립운동의 영웅적 정신을 계승한 학생들에 의하여 부패하고 잔인한 전제정치가 종식됨을 환영하는 글을 실린다. 그는 이 글에서 새 정부는 정의를 구현하고, 정치적인 이익에 앞서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 건전하고 유능한 정부가 들어 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것과 구 정부에 마지못해 동조하였던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정부는 그해 12월 17일 외국인에게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행운의 열쇠’를 증정한다. 그는 4‧19 목격기 ‘내가 본 한국혁명’ 을 1961년 정초에 한국일보에 투고한다. 그 해 5·16이 일어나자 Korean Republic에 5·16은 부정과 부패를 막고, 한국이 번영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라는 요지의 글을 투고한다. 그는 또 캐나다의 ‘Daily Mercury’지에 한국의 군사혁명을 소개한다.
그는 Ontario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 교실의 교수로 그리고 1916년부터 1920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 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1958년부터 서울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5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업적은 북미지역 소에서 발병하던 원인 모를 출혈성 질병이 부패한 Sweet Clover에서 유래함을 밝힌 것이다. 그는 소의 사료로 쓰이는 Sweet Clover가 부패하면 Coumarin이라는 혈액응고 방지 물질이 만들어짐을 밝혀내어 미국 수의학회지에 발표한다.
이 질병은 후에 Sweet Clover Disease로 명명되었고, 수의내과학교과서에 사료 유래 질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Coumarin은 현재 쥐약 Warfarin과 혈액응고 방지제 Dicoumarol의 원료로 쓰이고 있고, 비타민 K의 작용기전을 밝히는데 기여하였다.
세계 제1차대전 기간 중인 1918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 – 현재 조류인플루엔자로 추정 – 으로 세계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5천만∼1억 명이 사망하였다. 그는 만주를 통하여 한국에 유입된 경위와 발생 현황을 미국수의사회지와 중국의학회지에 발표하였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에서 씨돼지를 수입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만 볼 수 있던 돼지 위축성비염이 한국에서도 발병하여 그는이에 대한 논문을 미국수의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그는 왕성한 연구 활동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의학자였다. 이런 연유로 독일 München의 Ludwig Maximilian대학교에서 명예수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수의학회 연례회의에서 ‘국제수의학회상’을 수상하였으며, Canada의 수의학협회로 부터 ‘The Medal of Saint Eloi’를 수여받았다. 또 Toronto대학의 개교 기념 100주년 기념식에서 명예법학박사, 서울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명예수의학박사,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그리고 경희대학교로부터 대학장을 받았고, 미국 수의과대학 병리학자협의회의 공로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스코필드는 1969년 말부터 기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이듬해 2월 20일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하여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장례는 광복회 주최 사회장으로 엄수되었으며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그는 운명하기 며칠 전 유린보육원에 1,500달러, 서울YMCA에 1,000달러 그리고 나머지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도록 양아들 이영소(당시 서울대 수의대 교수)에게 전하라는 유언장을 전택부(당시 서울YMCA 총무)에게 넘긴다.
스코필드는 돈독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삶,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는 때 묻지 않은 한국 사람을 사랑하였고, 한국동란으로 부모를 잃은 불쌍한 고아와 경제적인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을 지성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강압통치를 일삼던 일제와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던 독재 정권에 대하여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약자에게 비둘기 처럼 부드럽게 강자에게는 호랑이 처럼 강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을 맡아 주세요.”
스코필드의 생애는 그가 생존해 있던 1962년 이장락(당시 서울대 수의대 교수)이 지은 ‘우리의 벗스코필드’와 이를 바탕으로 그가 서거할 때까지의 전 생애를 담아 1980년 펴낸 ‘한국 땅에 묻히리라’ 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재편집하여 2007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바람출판사)이 발간되었다. 이 글은 위의 책을 바탕으로 간추린 것이다. 2006년 3월 1일 EBS는 3․1독립운동 특히 제암리 사건을 다룬 스코필드 다큐멘터리 ‘민족대표 34인’을 방영하였고, 2010년 3월 1일에는 이 동영상에 영어 자막을 넣어 아리랑 TV에서 방영하였다. 이 동영상은 스코필드박사 사이 버기념관(http://schofield.snu.ac.kr)에 게재되어 있다. 2001년 3월 1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이 기념관에는 그 당시 스코필드의 행적과 그가찍은 만행 현장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타계하였던 해 9월에 스코필드기념강연회가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성경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호랑이스코필드동우회(회장 정운찬)’가 발족되었다. 2000년에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홈페이지에 스코필드사이버기념관을 개설하여 전기 ‘한국 땅에 묻히리라’를 전제하고 각종 사진자료, 연구업적 등을 올려놓았고, 2010년 이를 보수하였다. 2003년부터 매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서거일을 기하여 묘지를 참배하고 ‘스코필드추모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호랑이스코필드동우회’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우회는 2009년 9월에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
업회(http://schofield.or.kr, 회장 유진, 명예회장 정운찬)’의 창립을 결의하고, 2010년 7월 보훈처로부터 법인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로써 사료수집, 추모행사, 장학, 동상건립, 기타 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국연식야구연맹은 ‘스코필드의 배려의 삶’을 그 정신으로 하고 있으며, 김양경(연맹 부회장, 기념사업회 감사)이 주도하여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교회와 초중등학교를 중심으로 스코필드 연식야구단을 창단하고, 2010년부터 스코필드배 연식야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1971년 서울대학교에서 스코필드 장학금이 지급되었으나 이후 중단되었다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와 동문, 정운찬 등 호랑이스코필드동우회 회원이 중심이 되어 (재)서울대학교 발전기금에 스코필드장학기금을 모금하여 2007년부터 관악 지역의 중학생과 서울대 수의대 재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현재까지 장학기금은 약 2억5천여만원이 모금되어 있다. 스코필드선양사업은 앞으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과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추진될 것이다.
스코필드의 모교인 Ontario수의과대학에서는 매년 추모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고, 병리학교실과 캐나다 교민이 중심이 되어 스코필드 장학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2004년 10월 캐나다 교민을 중심으로 ‘스코필드박사 동상 및 추모공원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강신봉)’를 발족하여 2007년 12월 기공식을 가졌다. Toronto동물원의 약 8에이커 부지에 Korean Garden과 박사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여2010년 2월 동상제막식을 가졌다. 이 사업을 위하여 한국 정부에서 이미 약 8만 달러를 지원하였고나머지는 교민 모금과 캐나다 정부의 지원금으로 충당할 것이라 한다.

다음 글은 Schofield의 아버지 Francis William Schofield, Sr.가 항상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던말로 Schofield 박사의 인생관이었다.

『인생에는 두 길이 있다.: 배려의 길과 기도의 길이다.
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력에서 힘을 얻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고,
행로의 불측을 각오하며,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한다.
기도의 생활은 사랑을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진리를 행로로,
신의 평화를 무적의 수호로 삼는다.』

이 문 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부학장, 학장 역임
대한수의학회 이사장, 한국식품위생안정성학회 회장, 한국농약과학회 회장 역임
농림수산식품부 축산물위생심의원회 위원장 역임
식품의약품안전청 식품위생심의위원회 식품위해평가분과, 오염물질분과, 잔류기준분과 위원장 역임
농촌진흥청 농약안전성소위원회 위원장 역임

『There are two ways through life : the way of care and the way of prayer. The way of
care has pressure of circumstances for its force, common sense for its guide,
uncertainty for its path, fear for its attendant and guard.
The way of prayer has love for its force, the Spirit of God for its guide, truth for its
path, and the Peace of God for its inviable g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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