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24 윌리엄 헌트/한위렴 선교사 (William B. Hunt, 186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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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규 교수 ‘한위렴의 황해도 재령 초기 선교역사’
(크리스찬 투데이 류정희 기자 입력 : 2004.10.13 11:32)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
최근 개최된 제 82회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민경배 박사)의 월례모임에서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는 ‘한위렴(William B. Hunt)의 황해도 재령 초기 선교역사’에 대해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민경배 박사는 “언더우드가와 모펫가 그리고 헌트가, 이 세 가문은 한국장로교회의 세 가지 신학 경향을 예시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여 헌트가에 대한 박 교수의 연구를 중요하게 평가했다. 다음은 박응규 교수의 발표문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 편집자주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평양선교를 위해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을 1890년 파송하였다. 그 후 1897년에는 황해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한위렴(William B. Hunt, 1869~1953)을 재령선교를 위해 파송하였다. 한위렴은 마포삼열과 더불어 서북지역의 기독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한국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대를 이어 후손들이 한국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장로교 선교사 가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언더우드(Underwood)가와 모펫(Moffett)가, 그리고 헌트(Hunt)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했지만, 국내외 정세가 마치 19세기 말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시기에 황해도 재령지역의 초기 선교역사를 한위렴 선교사를 중심으로 고찰함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한위렴을 통해 황해도 재령지역에 시작된 초기의 선교역사를 살피는 것은 장로교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 미래의 한국장로교회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것이다.

한위렴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 신앙과 선교적 비전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비국교도 청교도 존 헌트(John Hunt)의 후손이다. 한위렴 선교사는 1897년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받아 그의 첫 안식년을 갖기까지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한위렴은 평양에 머물면서 재령에 선교본부가 세워지기까지 그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회전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재령 선교를 위한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

재령은 당시 도청 소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였던 해주나, 교통의 중심지였던 사리원보다는, 선교사들이 여러 지역에 살고 잇는 사람들과 용이하게 만날 수 있는 조그만 읍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재령을 선교의 중심지로 선택한 것이다. 재령을 개척한 선교정신은 바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개념’ 때문이었다.

마포삼열과 한위렴은 누구보다도 장로교 신앙고백과 신조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교리교육을 강조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들을 철저한 교육을 통해 양육하는 것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시행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장로교 신학의 기반인 칼빈주의와 신조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미국 청교도들과 장로교회가 추구했던 원리를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적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로교회의 전통과 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장로교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마포삼열은 자진전도와 자력운동 그리고 자주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한국 장로교회의 중요한 특성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마포삼열의 선교에는 배후에서 활동한 한석진 목사의 동역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선교의 비전을 황해도 재령에 실현되도록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마포삼열의 동역자, 한위렴 선교사였다.

한위렴과 한부선 두 부자(父子)와 평생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박윤선도 북한 개척선교 당시에 한위렴 선교사처럼 널리 복음을 전파한 이는 없으며,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확고한 제창자로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언급하였다. 한위렴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이야말로 신약성경의 전도원칙이며, 한국교회가 자립하는 첩경이고, 한국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지도자와 전도자, 그리고 해외로 나가 사역할 선교사들까지 양성할 실천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성경연구에 근거한 자립, 자치, 자전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세워 나갔다.

한위렴은 선교사역에 중점이 되는 신약성경의 교훈들을 선교본부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교훈들은 가능한 한 자영 능력이 있는 현지 교회를 설립하는 것과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자나 전도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외국의 선교사로까지 사역할 수 있을 인재의 양성, 그리고 성경번역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등을 포함한다.

한 작은 읍이었던 재령은 황해도 지역의 교회부흥과 다양한 사경회, 재령 성경학교 운동, 그리고 명신학교를 통한 인재양성 등을 주도해 나가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미국에서 진행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세워진 여러 성경학교들을 통하여 배출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다양한 전도와 봉사활동에 헌신하였다.

뿐만이나라, 1908년에는 재령 제중병원이 설립되어 황호리 선교사가 순회 진료와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 선교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황해도 재령에서의 선교사역은 이렇게 복음전도와 함께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사회적 차원의 관심이 균형을 이루며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합방으로 인하여 시련이 가중된 상황 속에서도 산동선교를 통한 중국 복음화의 선교적 거보를 내딛는 데 한위렴의 노력은 매우 중요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은 한위렴으로 하여금 한국 장로교회가 초기부터 중국선교를 품을 수 있는 산파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위렴은 한국교회를 통한 중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자적인 안목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지역의 선교는 단순한 복음전도의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의 기지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재령지역의 기독교회는 기대이상으로 발전하였으며, 평양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성장이 둔화되고 영적 활력을 상실한 가운데 새로운 활로를 시급하게 모색해야만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한위렴의 재령선교의 핵심은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학과 청교도 신앙이었으며, 복음전도와 선교지향적이면서도 교육과 의료 선교 등을 병행하면서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적절하게 적용하였다.

뿐만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의 자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재령은 소래에서 시작된 자생적 한국교회의 신앙을 계승하면서도 평양과 함께 서북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재령에서의 한위렴 선교사역은 다른 지역으로 성경적 신앙을 파급하는 통로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감당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바른 신학적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개혁으로 비롯되는 부흥’이 절실한 한국장로교회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한위렴의 재령선교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왜냐하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면서 성경적 신앙과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타협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교회역사는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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