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20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William M. Baird, 1862-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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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부산과 경상도 북부지방을 전도 여행하기 위해 4월 17일 서경조(徐景祚) 전도사와 박재용 소년과 함께 부산을 떠나 동래­밀양­청도를 거쳐 조랑말을 타고 팔조령(八助嶺)을 넘어 4월 22일 오후 1시경 대구에 들어왔다.
그후 3일 동안 대구에 머물면서 전도서적을 배포하는 등의 전도 활동을 하는 한편, 대구가 선교기지[Station]로서 적합한지 여부를 검토한 후 상주­안동­의성­경주­울산을 거쳐 부산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듬해 재차 방문한 배위량(裵偉良)은 미국 해외 선교부에 대구가 선교기지로 적합하다는 보고와 함께 개설 신청을 하게 되고, 1895년 11월 ‘부산 스테이션의 감독을 받는 내륙 지회로서 허가’를 받아 선교기지 개설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지방의 선교가 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구가 선교기지로서 적합하다고 본 이유는 다음의 6가지 점들 때문이었다.
① 경상도 북부 지방의 중심지이고 ② 도내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며 ③ 교통 상으로 어느 방향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변에 있고 낙동강을 통하여 부산과 연결된다. ④ 경상감영이 있고 대구도호부가 소재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⑤ 상업적으로 도내와 다른 남부지역 사람들도 많이 찾는 약령시가 열리는 중요한 곳이다. ⑥ 외국인이 부동산을 구입,수리,입주하는 경우에도 관리들이 방해하지 않는다.
1896년 4월 부인(Annie L. Adams)과 아들(John)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해 온 배위량은 그해 12월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임명되어 대구 선교를 자신의 손아래 처남 아담스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대구를 떠나게 된다. 배위량 선교사가 대구를 떠난 것은 대구사람들의 호기심어린 행동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견디지 못한 문화적 충격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Richard H.Baird, 1968U.S.A. 이 책은 배위량 선교사의 아들 리쳐드 베어드가 쓴 아버지의 전기로 개신교의 대구 전래 과정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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