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히말라야 이야기’ <24>
과거 티베트 인구 5%에 해당하는 귀족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티베트 전체의 토지 90% 이상을 차지하는 등 경제권도 장악했다. 관료, 세습귀족, 승려로 구성된 귀족 가운데 특히 승려들은 정교합일(政敎合一)의 법왕(法王) 달라이라마가 다스리는 신의 왕국인 티베트사회에서 신분이나 사회적으로 존귀하게 대접받았기에 일부 출가는 과거급제와 같은 성격도 없지 않았다. 달라이라마보다도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귀족이 실세였으며 티베트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라마교가 들어온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 귀족들은 기득권유지를 위해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의 혼인형태와 데릴사위·양자 등의 방법으로 혼인할 수 있는 범주를 폐쇄적으로 운용했다.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 재신과 중추원 추신을 합친 재추회의를 연상시키는, 청대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정치기구인 갈하(噶廈 bkav-shag)는 175명씩의 승려와 관원으로 구성됐다. 귀족 관료 승려들의 관심사는 이곳에서 몇 자리를 차지하느냐였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권력투쟁 와중에 우리 조선 시대 몇몇 왕처럼 역대 달라이라마도 몇 명이 독살됐다는 의견이 학계에 제시된 바 있다.
농노출신이었던 왕축은 현재 중국 공산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과거 농노 시절보다는 지금이 살기는 훨씬 더 낫다고 회고한다. 1960년 티베트를 여행한 스튜어트와 겔더는 사원에서 양 두 마리를 훔치다 잡혔던 농도 세레 왕 퉤이와 면담했다. 당시 퉤이는 사찰 주지의 명령으로 두 눈이 완전히 뽑혔고 손은 잘려나갔으며 더는 자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했다. 절도를 저지른 다른 몇몇 사람들은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때렸다. 특히 추운 밤 야외에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기도 했다고 한다. 죽음만은 신에게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추운 밤이 지나면 시체를 치워야 하는 사실상 더 잔악한 사형인 셈이다. 이에 대해 톰 그룬필드는 티베트는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했다. 미국의 티베트 연구자 P. Carrasco도 그의 평론 ‘Land and Polity in Tibet’에서 1951년 전까지 티베트 사회는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된 봉건(封建)사회라고 서술했다고 한다.
1895년 티베트를 방문한 영국인 웨델 박사는 참을 수 없는 승려들의 독재에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그 승려들이 불어넣은 악마적인 미신으로 공포에 떨었다고 했다. 정치, 경제권과 함께 신앙까지 장악하고 마녀사냥을 했던 서양 중세의 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904년 영국인 여행자 오코너는 티베트에서 대지주와 승려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조잡한 미신을 만들어 일반사람에게 불어넣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1937년 스펜서 채프먼은 라마승들은 길가에 버려진 거지들을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사원 특권을 보호하고 세력과 재산을 늘리기 위해 지식까지도 철저히 조작했다고 전했다. 1959년 안나 스트롱은 티베트 귀족들이 사용했던 고문기구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다.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다리 분쇄기, 내장을 파내는 기구, 아동용의 수갑까지 있는 것을 봤으며 강간당하고 코가 잘려나간 여자의 사진들도 전시됐다고 알렸다.
티베트의 귀족과 승려들에게 중국 공산주의자의 개입은 대재앙이었고 당연히 침략일 뿐이다. 대장정 시절 윈난 성 등을 지나면서 모택동은 티베트 귀족과 승려들의 폐해를 보고 이를 갈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로 중공은 티베트를 점령하자마자 귀족과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교의 모든 행사를 금지했다. 기득권을 박탈당한 귀족과 승려 대부분이 1959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타국으로 망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도 한다.
2008년 4월 28일 성화 봉송 행사장이 중국의 오성홍기로 넘실거려 서울이 마치 중국인 듯한 모습도 그려냈다. 올림픽성화가 한국에 도착하자 중국 유학생들은 티베트 독립요구 등을 지지하는 한국인 시위대로부터 성화 봉송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모였다. 중국대사관이 사전에 이들의 행사 참가를 독려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집회에 참여한 한 시민은 티베트 인권을 위한 집회 도중에 날아온 기계용 절단기에 맞아 전치 4주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날 중국인 불법시위대가 합법적인 한국인 시위대에게 한국 땅에서 저지르는 폭력도 막아주지 못했다며 당국을 비난하고 중국대사관 측에 사과를 촉구하고 경찰청에 고소장을 넣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공교롭게도 이즈음 인터넷상에는 앞의 잔악한 귀족들의 모습이 소개된 “조작된 신화, 티베트와 달라이라마”라는 글이 유포됐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유명한 칼럼니스트로서 ‘카이사르의 죽음’(무우수, 2004)으로 유명한 마이클 파렌티가 쓴 ‘낯익은 봉건주의’, 도널드 로페스가 쓴 ‘7개의 진실’, 포스터 스톡웰이 쓴 ‘신화와 현실’의 세 글은 우리가 알던 티베트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를 단박에 깨준다. 사실이라면 귀족과 승려들에 의해 자행된 참상과 야만성은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초의 신진사대부들이 왜 그리 고려의 라마교를 깎아내렸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 세 글은 티베트 망명정부소식과는 대조적으로 웹상에서 거의 퍼지지도 않았으며 그에 대한 보도도 반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국인이 퍼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이 글들의 번역은 사실상 홍보전에서 참패했다.
최윤근이 옮긴 이 글들의 저자 세 명 모두는 1980년 이전 티베트를 직접 방문한 적이 없다. 마이클 파렌티가 인용한 1904년 티베트를 여행한 영국인 여행자 오코너 등은 1904년 8월 영국의 티베트 라싸 침공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한 사람들로서 당시의 티베트를 왜곡하는 대신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영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왜곡에 대한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개별 사항에 있어 거짓이라는 적극적인 증거나 반론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나오기를 개인적으로는 소원한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우리도 3·1운동을 일으켰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원하는 것은 과거의 티베트로 복귀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다람살라로 망명한 사람들 가운데 기득권을 가진 티베트 귀족들과 고위 승려들도 과연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그들이 그걸 희망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고 해도 역사학도로서 믿거나 말 거나가 아닌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아직도 건재한 친일파 후손들의 존재가 충분히 말해준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dogyeom.h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