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받는 기독교] 콥트교회 고난의 역사2013.08.23 17:02
이집트에서 발생한 최대 유혈사태 속에 콥트교회의 수난이 또다시 이어지면서 1900년 콥트교회 질곡의 역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콥트교회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콥트(Copt)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os’의 아랍어 약어로 이집트에 살던 원주민을 뜻한다. 이집트 기독교는 1세기 중엽인 AD 60년 마가의 선교에서 시작됐다. 이후 사막의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확산됐고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오리겐과 아우구스티누스 등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또 아타나시우스와 키릴로스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는 3∼4세기 교회의 스승들이 많았다. 그리스 출신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 등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하지만 3세기 말 로마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핍박을 받으면서 수많은 콥트교도들이 순교했다. 핍박은 이른바 ‘은자(隱者)’의 삶을 발전시켜 사막의 수도원 운동 등 독특한 콥트 기독교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총신대 라은성 교수는 “콥트교회 역사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며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이집트 문화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4∼5세기에는 유대파와 이교도 등과 싸웠다”고 말했다.
콥트교회는 신학적으로 칼케돈공의회(45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시하는 신학노선을 택하면서 독자적인 교리를 이어왔다. 이 때문에 동·서방 교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자’로서의 설움을 삼키며 살아야 했다.
교회 역사가들은 칼케돈공의회에서 콥트교회가 채택한 신학은 예수의 인성을 부인한 게 아니라 인성을 더 거룩하게 보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한다. 콥트교회는 이때부터 이집트의 민족 종교로 나타났고 다른 교회들과 예전과 의식에서 구별됐다.
콥트교회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지배 속에서도 고난을 받았다. 황제의 지명을 받은 멜카이트 대주교는 콥트교회를 이단으로 취급해 신자들을 학살했다. 분열을 거듭하던 콥트교회는 642년 이슬람의 침공을 받으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었고 850년부터 칼리파 무타왁킬이 압정을 펴면서 점차 소수종교로 변했다. 거주지도 나일강 상류 쪽으로 좁혀져갔다.
이후 969년 파티마왕조가 등장해 유화정책을 펴면서 콥트교도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교인은 점점 줄었고 고유 콥트어도 잃었다. 12세기 말까지 이집트가 완전히 이슬람화되면서 14세기에 또다시 콥트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이 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콥트교인들이 증가했다. 무슬림들은 당시 개종자가 진짜 이슬람 신앙이 있는지 모스크에서 감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517년 오스만 터키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엔 콥트교회는 암흑기였다.
콥트교회 부활의 여명은 17세기부터 시작된 가톨릭의 노력으로 1899년 콥트 가톨릭교회가 생기면서다. 당시 교인은 10만명 정도였다. 19세기 이후엔 일부 상류층 콥트교도의 도움으로 교회 교육에 힘썼다. 교회학교와 신학교를 세워 사제들을 훈련시켰고 많은 젊은이들이 개혁 성향을 가지게 됐다. 1926년에는 미국 선교부가 콥트복음교회를 세우면서 침체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계기도정보’의 편집자 제이슨 맨드릭은 “이집트 교회는 1900년간 차별 속에서 신앙을 유지했다”며 “고난의 역사는 ‘순교자의 교회’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평했다. 콥트교회의 공식 명칭은 ‘이집트정교회(the Egyptian Orthodox Church)’이다. 정교회(正敎會)란 니케아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에베소회의(431), 칼케돈공의회 등 1∼7차에 걸친 종교회의만 정통으로 인정한다. 콥트교회는 현재 타와드로스 2세가 교황이며 정교회의 예배 형식을 따른다. 정확한 신도수는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통상 이집트 전체 인구의 10∼12%로 추산한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