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와하비즘’을 모르면 IS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전직 MI-6 요원이자, ‘레지스탕스: 이슬람 혁명의 에센스'(Resistance: The Essence of Islamic Revolution)의 저자인 알라스테어 크룩이 쓴 글입니다.
이라크에 갑자기 출현한 ‘IS(이슬람 국가)’는 서방국가에 작지 않은 충격이다. 서구는 IS의 난폭성에 경악하는 동시에, 수니파 젊은이들이 IS에 왜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는지도 의아해 하는 중이다.
서구에서 더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이런 위험한 사건 전개에 불구하고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이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 황당할 정도인 그들의 미온적 태도를 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IS가 자기들에게도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나?”라는 질문이 입에서 절로 튀어 나온다.
*역자 주 : 와하비즘(Wahhabism)은 엄격한 율법을 강조하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의미한다. 18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지원을 받은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1703~1792)는 이슬람 사회가 타락하고 있으니 마호메트 시대로 되돌아가자며 와하비즘을 제창했다. 수니파의 분파인 와하비즘은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중동의 가장 거대한 강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비즘의 총본산이라는 사실이다(사우디 여자들이 운전도 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중동에 피를 불러오고 있는 와하비즘을 키워준 것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다. 특히 미국은 냉전 시절 중동의 사회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로 와하비즘을 오히려 지원했다. 당시 ‘악의 축’을 막으려던 노력은, 냉전이 끝나자 새로운 ‘악의 축’을 탄생시킨 셈이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의 과격한 독트린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사우디아라비아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국가로서 지향하는 방향과 자세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우디의 이중성
이슬람 국가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의견충돌과 긴장상태를 이해하려면 국가적 독트린과 역사적으로 자리 잡아 온 사우디 왕국의 이중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우디의 정체성에 관한 큰 줄기 중 하나는 모하메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와하비즘의 창시자)와 그의 철저하고 과격한 배제성 이념을 강행한 이븐 사우드에 직결되어 있다(원래 알-와하브의 시대의 이븐 사우드는 너무나도 뜨거운 가난한 네지드 사막 지역을 무대로 베두인족을 습격하며 연명하던 일개 지역의 리더 정도였다).
이해하기 힘든 이 이중성에 대한 두 번째 줄기는 아브드 알-아지스 왕의 자주국 설립을 위한 1920년대의 결단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우선 영국, 미국과 외교를 맺기 위해 이크완파의 폭력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와하비즘을 제도화하면서 이슬람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폭력혁명을 문화혁명으로 대체했다. 그 이후 70년대의 고유가 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이크완파 문제를 무마하고 수출도약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혁명’은 무슨 온순한 개혁이 아니었다. 정작 아브드 알-와하브가 느낀 종교적 부패와 일탈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기반으로 한 혁명이었다. 그는 이슬람 종교에 스며든 모든 이단성과 우상숭배의 제거를 외쳤던 사람이었다.
무슬림을 자칭하는 사기꾼들
미국 작가/언론인 스티븐 콜은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14세기 학자 이븐 타이미야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아브드 알-와하브가 “우아한 척, 세련된 척, 담배와 대마초를 늘 피고 드럼을 둥둥 치며 아랍 지역을 거쳐 메카를 찾던 이집트인들과 오스만 귀족들에 대한 증오로 불탔다”고 말한다.
알-와하브의 시각에서 이들은 무슬림이 아니라 무슬림인척하는 사기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지역 주민인 베두인 아랍인을 더 탐탁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다. 베두인들이 성자 숭배를 하고 묘비를 세우며 ‘미신(예를 들어 여느 묘 자리 또는 일정 장소에 신성한 기운이 있다고 믿고 숭배하는 행위)’을 믿는 것이 그를 화나게 했다.
알-와하브는 이런 모든 행동을 비다(bida)라고 일컬었다. 즉 하나님이 금지한 행위라는 것이다.
알-와하브는 자기의 먼 스승 타이미야와 동의했다. 즉 모하메드 선지자가 메디나에 묵었던 시기가 이슬람 사회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였다고 믿었고, 모든 무슬림은 그때의 사회문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이것이 살라피즘 교리를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미야는 시아교, 수피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과의 전쟁을 선언했었다. 또 모하메드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과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도 금지했는데 그 이유는 그런 행동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화 시키는 행위와 같아서 일종의 우상숭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함축해 원칙을 정했다. 알-와하브가 주장하는 이슬람 교리에 대해 ‘의심 또는 주저함’을 보이는 사람은 ‘목숨과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는 극적인 선포였다.
그리고 와하브 독트린의 주요 교리 중 탁피어(takfir), 즉 ‘무슬림의 파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탁피어 독트린에 의하면 알-와하브나 그의 추종자에게는 어느 무슬림이든 주체의 완벽한 권리(예를 들어, 왕)에 대적하는 하는 자를 인피델(신앙심 없는 자) 취급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아브드 알-와하브는 조상과 성자 또는 천사를 칭송하는 모든 무슬림을 탄핵했다. 오로지 하나님에게 향하여야 하는 복종이 이런 행동으로 흐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와하비 이슬람 교리는 아래 사항들을 금지한다. 성자 또는 조상/죽은 가족을 위한 기도, 묘지 또는 성지순례, 성자를 기념하는 행사, 모하메드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일, 그리고 무덤 위에 묘비를 세우는 행위.
와하브는 추종자의 완전 순응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런 순응은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각 무슬림은 오로지 한 명의 무슬림 지도자(존재한다면 칼리프)에게 자기의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이 마땅하고 그의 아내와 딸들은 훼손을 당해야 하며 그의 모든 소유를 압수해도 좋다”라고 그는 적었다. 배교자 목록에는 시아파와 수피파를 비롯한 다른 이슬람 교리 추종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브드 알-와하브는 이들을 아예 무슬림 신도에서 배제했다.
지금까지의 글을 읽으면 와하비즘과 IS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분열은 서서히 나타났다. 즉 와하브 교리의 세 가지 기둥,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완전한 통치, 와하비즘의 완전한 권한, 그리고 ‘말’ 또는 ‘사원’에 대한 완전한 운용권리를 “하나의 지배자, 하나의 권한, 하나의 사원”이라는 독트린으로 제도화하면서 문제가 야기됐다.
문제는, 다른 면에서는 와하비즘을 모두 준수하는 이슬람 국가가 수니파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부정하는데 있다. 따라서 IS는 몇몇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1741년~1818년 사이의 역사 요약
이런 극심한 과격성 때문에 알-와하브는 고향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오랜 방랑 후 1741년에 이븐 사우드와 그 부족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븐 사우드는 알-와하브의 가르침에서 빨리 눈치챈 점이 하나 있었다. 즉 알-와하브의 이념을 핑계로 이제까지의 아랍 전통과 관습을 뒤집을 수 있는, 즉 권력을 쥐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략은 오늘의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점령한 모든 시민을 완전히 굴복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와하브의 독트린을 포섭한 이븐 사우드는 근처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했다. 물론 이전에 해 오던 대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랍 세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핑계로 한 무력 실시가 아니라 지하드를 구실로 맘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븐 사우드와 알-와하브는 지하드를 위한 순교라는 아이디어를 재생성시키면서 그런 업적을 위해 순교하는 이는 곧바로 극락을 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초기에는 몇 개의 지역을 점령하여 자기네들의 규율을 준수시켰다. 점령을 당한 주민들은 몇 개 선택권이 없었는데 와하비즘으로 개종하는 것 아니면 죽음이었다. 1790년대가 되어서는 이들의 동맹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는데 메디나와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를 습격하는 것을 일삼았었다.
그들의 전략은 오늘의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점령한 모든 시민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1801년엔 이들 동맹이 이라크의 성도 카르발라를 공격했다. 아이와 야자를 포함한 수천 명의 시아파 주민이 죽임을 당했다. 또 수많은 사원이 파괴되었는데 모하메드 선지자의 손자인 피살되었던 이맘 후세인의 성지마저도 무너졌다.
그때 상황을 영국 간부 프란시스 워든 중위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이 (카르발라) 전체를 다 약탈했다. 또 후세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단 하루 만에 아주 교묘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5천 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사우디 개국에 맞추어 첫 역사가 역할을 맡았던 오스만 이븐 미셔 나즈디는 이븐 사우드가 카르발라에서 1801년에 대학살을 이행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대학살에 대해 매우 당당하게 나열했는데 그 내용은 “카르발라를 점령한 후 주민들을 학살하고 일부는 종으로 만들었다. 우주의 주인이신 알라에게 찬양을 드리자. 그리고 그 날에 대해 우리는 사과할 일이 없으며 오히려 ‘믿지 않는 이에게는 같은 징벌’을 약속한다.”
1803년에는 압둘 아지스가 성도 메카에 입성했는데 공황에 떨던 주민들은 곧바로 투항하였다(메디나도 같은 사례를 겪게 된다). 와하브 추종자는 유적물들과 그 안에 포함된 무덤과 성지를 다 쓰러뜨렸다. 그랜드 모스크 주변, 세기를 거쳐 내려온 이슬람교 건축물들은 하루가 지면서 남은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1803년 11월에 시아파 암살자가 카르발라에 대한 복수로 압둘 아지스 왕을 피살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 사우드 빈 아브드 알-아지스가 왕위를 이어 아라비아를 통치했다. 오스만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하나하나 아라비아 동맹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812년, 이집트인으로 형성된 오스만 군인은 아라비아 동맹을 메디나와 제다, 메카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1814년, 사우드 빈 아브드 알-아지스는 고열로 죽는다. 그의 아들 압둘라 빈 사우드는 불행하게도 오스만 세력에 붙들려 이스탄불로 끌려가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어느 방문자 증언에 의하면 3일 연속 그를 길거리에서 창피를 주다가 목을 매여 죽인 뒤 머리는 잘라서 대포에 넣어 발사하고 심장을 도려내서 몸에 박았다고 한다).
1815년에는 오스만을 대신한 이집트의 병력이 와하비 세력을 완파하였다. 그리고 또 1818년에는 오스만 세력이 와하비파의 수도 다리야를 점령했다. 첫 사우디 국가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몇몇 와하비 잔류세력은 사막으로 피신하여 재정비한 후 19세기 내내 매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IS, 그리고 역사의 반격
예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이라크 민중 중에 IS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부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18세기에 유력했던 와하비즘은 네지드 사막에서 말라 죽기는커녕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자 그 혼란 속에서 다시 급성장했다.
20세기 알 사우드 국가는 18세기 조상의 환생이라고 할 수 있는 과묵하지만, 정치적으로 민첩한 새 아브드 알-아지스가 이끌었다. 그는 여러 개로 분열된 베두인족을 통일한 후 아브드 알-와하브와 이븐 사우드의 모범을 좇아서 사우디 ‘이크완’이라는 이슬람교 전사를 출범했다.
‘이크완’은 1800년대 초에 아라비아를 거의 다 장악했던 맹렬하고 준 독립적인 와하비즘 추종자들의 재생이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메카와 메디나 그리고 제다를 191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재점령했다. 그런데 아브 알-아지스는 자신의 통치가 이크완 내의 과격한 분파에 인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크완의 반란으로 내전이 1930년대에까지 이어졌는데 궁극적으로는 왕이 이 일을 정리했다. 기막히게도 왕이 직접 기관총으로 다 쏴 죽였다.
새 아브드 알-아지스는 고정관념이 하나하나 깨지는 것을 느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석유가 발견된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은 알-아지스를 홀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당성이나 합법성 차원에서 샤리프 후세인을 아라비아의 지도자로 선호하는 눈치였다. 사우디는 더 세련된 외교 정책을 수립해야했다.
그 결과로 와하비즘은 혁명적인 지하드와 종교적인 탁피어 정화에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보수성을 지향하는 다와(da’wa-이슬람교의 부름)와 왕실에 대한 충성과 왕의 전폭적인 권한을 지지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석유로 조성된 부가 와하비즘을 널리 전파하다
“석유로 부국이 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제 와하비즘을 전체 이슬람 세계에 전파할 시기라고 여겼다.”고 프랑스 학자 가일스 케팰은 말했다. 와하비 이슬람교를 구축함으로 종교 내의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즉 국경을 넘어 모든 이슬람 신도를 묶어주는 그런 체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런 소프트 파워를 현실화하기 위해 수조 달러가 투자되었고 지금도 투자되고 있다.
이런 엄청난 돈으로 초래된 소프트 파워와 미국에 유리하게 수니 이슬람을 잘 운용하겠다는 사우디의 약속이 하나로 묶여 작용을 시작하면서 와하비즘이 교육계와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이슬람 세계에 퍼뜨려지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방국가들은 사우디의 정책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런 의존도는 아브드 알-아지스가 얄타 회담에서 돌아오던 중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미국 군함에서 만난 이후로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사우디 왕국을 보고 그 어마어마한 부, 현대화되어 보이는 체제와 이슬람 세계에서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에 넘어가 버렸다. 그들은 사우디 왕국도 시대의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즉 수니 이슬람의 운용으로 어쩔 수 없이 현대화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믿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에 대한 사우디아바리아의 이크완은 1930년대에 소멸하지 않았다. 후퇴는 했으나 그래도 사회 여느 부분에 연결을 이어갔으며, 그 결과가 IS에 대한 사우디의 엇갈린 자세다.
IS는 한편으론 매우 와하비즘과 가깝지만, 또 한 편으론 극적으로 다르다. 현시대의 와하비즘을 바로 잡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IS는 탈메디나 움직임이다. 모하메드 선지자 보다는 첫 두 칼리프의 행적을 모방하는 그룹이다. 그리고 사우디 집안의 군림에 대한 정당성을 맹렬하게 부정하고 있다.
석유의 시대와 함께 사우디 왕족의 체제가 더할 나위 없이 방대해지자 오히려 이크완 이념은 더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파이살 왕의 현대화 노력과 무관하게 말이다). ‘이크완 방식’을 많은 주요 인물들과 그리고 교주가 지지했고, 아직도 지지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런 이크완 방식으로 새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오늘날, IS의 왕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행동은 문제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모습 자체를 사우디-와하브 프로젝트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사회주의, 나세르주의 억제, 반소련, 반이란주의 등을 지지하던 서방국가들은 그 속에 잠재되어있는 와하비 충동은 외면하고 사우디의 부와 현대화와 왕족의 지배력에만 초점을 두었다. 더군다나 서방국가 차원에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이용도를 배제할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쓰러뜨리는 것이나 맘에 안 드는 중동의 지도자를 밀어내는 데는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니 시리아의 아사드를 적대한 반란군을 제압해야 한다는 사우디-서방국가의 입장이 나오자 신이크완 스타일의 공포와 폭력을 겸비한 IS가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에 놀랄 일이 아니다. 또 와하비즘의 역사를 고려할 때 시리아에 ‘중립적인’ 반란군이라는 것이 신화의 유니콘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도 없다.
과격한 와하비즘에서 중립적인 세력이 배출될 것이라는 상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또 ‘하나의 지배자, 하나의 권한, 하나의 사원’이라는 이념하에서 중도와 관용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상상은 또 어디서 나온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상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