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사파송 100년 “산동선교”의 실제 (3)
중국선교사파송 100년
“산동선교”의 실제 (3)
글을 시작하며….
필자는 本誌 9월과 10월호에서 한국 최초의 선교사 3인방(1),(2)에서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의 산동성 래양에 파송에 관하여 파송결정과 선교지 선정의 배경, 선교사 파송 및 정착과 사역, 산동 선교에 나타난 선교원리와 의의를 살펴본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선교중단 위기를 극복하고 확장 발전된 산동선교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파송 된 선교사들과 선교사역, 선교사 파송과 파송 이후의 멤버케어에 관한 선교부 정책들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I. 산동 선교의 중단위기와 지속
1. 산동 선교의 중단의 위기
선교 중단의 위기의 시점에서 선교사들의 이러한 결정 배경을 회고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선교현지의 생활의 열악한 환경과 선교현장이 주는 압박감 그리고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이해하지 못한 총회의 정책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1) 이들은 선교사에 대한 지원 부족, 8개 월간에 걸친 가뭄, 경제적 고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총회 또한 선교 열정에 비해 선교정책이나 파송 후 관리규정 등은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도 분명하다. 이들을 파송하였던 조선 예수교 총회는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오히려 그 동안의 선교를 돌아보는 경고(警告)로 받은 것 같다.
2,총회 전도국의 대응책
총회 전도국은 어렵게 시작된 타 문화권 사역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였다. 총회 전도국은신병 치료차 귀국하여 있던 박태로 선교사를 재 파송하며, 방효원 목사를 파송하기로 임시결의 하고, 1917년 5월에 선교지에 이들을 파송함으로 무사히 중단의 위기를 대처하였다. 총회 전도국의 이와 같은 신속한 대응은 한국교회의 산동 선교를 이어가는 귀한 일이었다.
박태로 목사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귀국하면서 홀로 남게 된 방효원 선교사는 중국어 구사가 불가능하였고, 총회는 중국어가 가능한 김병규 조사를 통역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는 신속한 조치를 취는 등의 발 빠른 조치를 취하였다.
II. 선교사
1. 다양한 선교사 부류
1917년에서 1957년까지 파송된 선교사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다양하게 분류해 볼 수 있다. 우선 신분상으로 목회자 선교사 그리고 의사나 교사와 같은 평신도 선교사들이 있고 , 대부분 기혼이지만 여성 싱글 선교사도 있고, 지역적으로 평안도, 황해도 등의 북쪽지방과 경북 대구와 같은 남쪽지방선교사도 있다. 즉 신분이나, 결혼여부 그리고 지역 등이 다양하한 것을 보게 된다.
총회는 목회자 선교사 선발에 있어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소속 된 조사 또는 목회 경험이 있는 목사로서 신학을 마치고 30세 이상 40 세 초반까지이며, 신앙과 목회적 열정 그리고 좋은 성품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 중에서 선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총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배치함에 있어서 각자의 은사를 적절하게 고려하고, 장기(長期)로 사역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예수교 총회 전도국은, 1917년에 방효원(方孝元)과 김병규를 래양, 홍승한(洪承漢)을즉묵, 1918년에 박상순(朴尙純)을 래양, 1922년에 이대영(李大榮)을 즉묵, 1931년에 김순호(金順好)를 래양, 1937년 방지일을 청도에 파송하였다. 파송 선교사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2. 파송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는, 장로로 교회를 섬겼고, 후에 신학을 공부하여 1915년 6월 장로회신학교를 제 8회로 졸업, 그해 8월에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희생적인 개척전도와 목회에 은사가 많은 사람이었다. 1935년까지 래양에서 사역하였다.
김병규 선교사는, 박태로 목사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귀국하게 됨으로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방효원 선교사를 위하여 파송된 사람으로, 조사로 교회를 섬기는 중 총회의 파송으로 통역으로 선교지에 파송되어 1918년 까지 사역하였다.
홍승한 선교사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11년 6월 징로회 신학교 졸업 그 해 9월 목사안수 받았으며, 대형교회인 대구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중, 1917년 9월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 될 만큼 사역과 인품에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총회 전도국에서 그가 선교사로 천거되었을 때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선교사 파송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홍승환 목사는 선교사로의 천거를 사명으로 받아드리고 순종하였다. 그는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어 중국선교에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1924년 까지 즉묵에서 사역하였다.
박상순 선교사는, 1918년 선교지에서 선교사 추가 파송을 요청해옴에 따라 추가로 파송된 선교사이다. 그는 장대현 교회에서 성장하였고, 숭실전문과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교육자적 자질과 학자적인 면을 갖고 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고 행정과 조직에 능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1940년까지 래양에서 사역하였다.
이대영 선교사는, 1921년 9월 평양총회에서 선교사 일인을 더 파송키로 하여 파송한 선교사이다. 경북 노회 소속의 목사였으며, 영적 역량이 많은 사람으로 선교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사역하였고, 의욕과 열정으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 이대영 선교사가 산동 즉묵(卽墨)에 귀임함으로 선교 열기가 가득하게 되었다. 복음전도의 은사가 많고, 기도에 강하며 영적은사 많은 선교사로 1955년까지 사역하였다.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共立)여자 신학교 졸업한 후에 정신, 함북의 보신 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하였으며,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 순호 선교사를 선정하여 파송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서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하여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김순호 선교사)는 두고 지역에 있는 여자들 가운데 사역하도록 파송되었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하여 주었다” 고 하였다. 1939년까지 사역하였다. 후에 1940년에 길림성 쌍양현에 파송되어 활동하다가 1942년 만주에서 사역하기도 하였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의 부친인 방효원 선교사가 1935년도 은퇴함으로 총회에 의해 선정되고 파송 받은 선교사이다. 1937년 4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파송식을 하였다. 당시는 중일전쟁으로 선교사역이 어려운 시기였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산동 청도(靑島)에서 어학연수를 하다가 1940년 청도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1957년까지 공산 치하에서 사역하던 중에 중국공산당 정부로부터 홍콩으로 추방당하였다.
III. 총회의 선교정책
1. 선교사 배치
조선장로회 총회는 선교사들을 선교지에 파송 할 때에 단독 사역의 형태로 하지 않고 반드시 팀을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최초로 파송 되었던 세 명의 선교사도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사역하였고,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고 협력사역을 하였다. 이렇게 팀을 이루어 사역함으로 서로 간에 영적 격려를 받을 수 있고, 안정감을 갖을 수 있으며, 각자의 은사가 적절하게 사용되어 선교사역에도 많은 시너지 효과를 유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칙은 산동선교의 큰 원칙이기도 하였다.
2. 선교사의 멤버케어 원칙
총회 전도국은, 최초로 파송되었던 3인방의 귀국 사태를 염두에 두었는지 선교사들을 위한 주택구입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 주택은 총회 차원에서 구입하였으며, 800여 평의 대지와 기와 18간, 초가 6간의 주택으로 나름대로 보다 나은 선교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선교사들을 위한 정책을 제정하여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재정부분에 있어 총회 전도국이 선교비를 일괄적으로 관리하였다. 총회의 결정을 거친 선교 예산은 현지 선교회 회계에게 직송 되도록 하였고, 선교사들의 생활비는 균등하게 지급되고, 사역에 관련 된 모든 수입과 지출은 현지 선교회가 본국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선교사의 배치는 세 명 이상 팀을 이루도록 하였고, 목회자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 그리고 여성 싱글 선교사가 함께 사역하도록 배치하고 선교지역도 현지선교회와 협의하고 배치하도록 하였다.
언어연수를 총회 정책에 반영하여 엄격하게 시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총회는 선교사가 현지에 부임하면 어학 선생 겸 전도인을 불러 3년간 중국어 학습에 전념하도록 하였고, 언어 연수를 위한 경비는 예산에 반영되어 있었다. 매년 시험을 치루고, 매년 모든 과목 점수가 70점이 넘어야 하고, 3년간 평균 점수가 70 점이 넘어야 선교사 자격을 부여한다는 원칙이었다.
안식년 제도를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안식년 제도는 제 2기부터 조성 되었다. 1918년 에 제정된 규정에 따르면, 선교사는 매 2년 마다 5개월씩 안식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22년 규정은 5년 사역 후 1년을, 1927년 규정은 7년 사역 후에 1년을 안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선교사의 선교 사역보고도 규정하고 있었다. 총회 전도국은 선교 사역 보고를 매년 정기 보고와 개별적인 보고로 나누어 하게 하였고, 정기보고는 현지 선교회가 매년 전도국에 보고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총회는 선교사 자녀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기에는 아무런 대안이없이 학비만 지급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1919년 1월에 래양에 평신도 선교사로 온 의사 김윤식의 부인인 박희복 선교사가 교사 경험을 살려 자신의 집에서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선교사 자녀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후 박상순 선교사가 합류하여 자체적으로 교육하였고, 조소일, 리영애, 편순남이 선교 팀에 합류하여 선교사 자녀 교육이 이루어졌다.
IV. 선교 사역의 열매들
한국인 선교사들은 미천한 선교기간과 적은 인원들이었지만 다양한 형태의 사역들을 펼쳐갔으며, 성령의 은혜로 많은 열매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사역들은 래양과 외촌(外村), 1919년 평도(平度), 즉묵, 청도까지 지역이 확장되며 진행되었다.
1. 다양한 선교사역
선교사들의 중점사역은 첫째로 교회개척 사역이었다. 선교사들은 구령의 열정과 다양한 형태의 전도를 실시하여 중국영혼들의 구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개인전도와 공중 전도를 실시하였고, 노방전도와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하였다. 또한 당시 선교사들은 두 가지 형태의 전도대를 구성하여 전도하였는데 좌당 전도대와 행전(유행) 전도대이다. 좌당(座堂) 전도대는 가옥을 임대하여 책. 걸상 등 필요한 기구를 갖추어 놓고 주일과 수요일 등에 예배 의식을 거행하여 복음을 강연하며, 평상시에는 개인 심방을 하며 전도하는 형태이다. 행전(行傳)또는 유행(遊行)전도대는 하나의 전도대를 구성하고 천막과 환등기, 유성기, 활동사진기, 성경화본 등을 준비하여 신자가 없는 동네로 다니며 전도하는 형태이다.
교회에서는 성경 도리반(道理斑)을 운영하며 새로운 신자들에게 구원의 기본도리를 가르치며 신자들의 신앙성숙을 꾀하였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 각성과 전도를 위하여 신앙의 좋은 본이 되는 중국 목사들이나 이대영 선교사 같은 이들을 초창하여 신앙 부흥 사경회를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은 주일학교 설립하여 사역하였다. 이대영 선교사의 부인 선교사와 박상순 선교사의 부인 선교사 등은 즉묵시의 집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하였다. 특별히 어린이 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안내하였고, 즉묵에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운영하였다.
성도 수와 교회의 숫자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특별히 1919년, 1920년의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부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13
1915
1920
1925
1930
1935
1940
1942
교회(개소)
0
1
10
12
15
21
33
35
성도(인)
0
40
520
823
1207
1400
1569
1716
둘째로, 현지 지도자 양성 사역에도 힘을 쏟았다. 1923년에 내양에 성경학원 세우고 현지 성도들 중에서 선발하여 전문적으로 성경교육을 실시하여, 중국인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사역을 진행하였다. 그 열매 중의 하나가, 1929년에 현지 중국인 류수법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박상순 선교사는 “한국선교사들은 교육사역에도 종사하였다. 선교부는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5년 과정의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열 여섯, 일곱 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였다. 그 학교는 10년 동안 계속되었고 졸업생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거나 신학교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김영동은 이 사역에 대하여 “현지인 목회자를 형성하고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선교 사역에 동원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의료 선교사역이 있다. 평신도 선교사인 의사 김 윤식은, 1918년 래양에 병원을 설립 계림의원(桂林醫院)이라 명하고,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 많은 경우 무료 진료였으며 목적은 전도하는 것이었다. 병원은 산동선교회 소속으로 자립선교 하였으며, 계림의원 김윤식 선교사의 선한 영향력이 현지의 교육계와 상업계, 관청까지도 미치게 되었고, 죄수를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감옥 전도의 문이 열리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1923년 선천의 주 현즉(朱賢則)장로, 1932년 경북의 안준호(三一醫院) 는 즉묵에 의원을 개업하며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총회파송선교들과 협혁하며 선교의 효율성을 높였다.
넷째로 교육사역을 하였다. 전도한 신자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 운영하였다. 당시 문맹율이 매우 높았던 때이고, 일반 교육환경 여건이 열악했던 시기라서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현지 선교사들의 모임인 산동 선교회가 래양에 애린(愛隣)학교와 즉묵에 애도(愛道)학교 등을 세워 운영하였다. 학교는 본국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학교가 1927년에 12개, 학생이 281명 까지 되기도 하였다.
다섯째로 긍휼사역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의 가난한 이웃과 소외 된 계층에도 선교의 손길을 펼침으로 예수님 사랑을 전하였다. 성탄절에 걸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하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도 구제사역을 하였고, 쌀이나 의류 등의 구제품을 구입하여 빈민 사역을 실시함으로 그들을 섬기는 본을 보였다.
여섯째로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하였다. 당시는 남성 선교사들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제한된 접촉과 부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함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총회는 여성 선교사 파송을 결의 하였다. 1928년 설립 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제 3회 대회인 1931년 평양총회에서 여성 선교사 파송을 결의 하고 김순호 선교사를 그해 9월에 파송하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함으로 여성들이 복음을 듣고 신앙성장에 좋은 방편이 되었고, 교회에서의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지게 되었다.
글을 마무리 하며
한국교회의 산동성 선교의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주권을 잃은 국가와 피선교국 27년의 미천한 역사, 총회가 생기는 기 출발점에 있는 우리 한국교회가 이룬 선교의 행보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글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보며, 선교사로서 감출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선교의 열정과 도전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싶다.
아쉬운 것은 시간과 지면상의 이유로 한국인 선교사와 그들의 사역 그리고 총회의 전략만 살펴보게 된 것이다. 당시의 선교지의 복잡하고 급변하는 상황이나 중일전쟁과 같은 중요한 요인과 당연히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할 귀중한 한국교회 초기의 역사를 그저 평면적으로 요약 정리하여 보았을 뿐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소개한 참고도서들을 참고하여 보실 수 있기를 기대한다. 향후 기회를 만들어 입체적으로 고찰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참고문헌>
1. 박기호, 『한국교회선교운동사 (I),(II)』서울:아시아선교연구소 출판부, 1999.
2. 백정성, 『한국교회의 초기 산동성 선교』, 서울: 도서출판 동서 연구개발원, 2012.
3. 변창욱, “한국장로교회 선교사 파송 100년1907-1956년”, 『선교와 신학』제 19집 (2007년 6월호):
4. 김성태, 『세계 선교 전략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6.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연구원 편, 『산동선교 100주년의 교훈과 제언』, 서울: 도서출
판 케노시스, 2012.
7. 김영동, “한국교회의 선교: 선교 초기부터 6.25 이전까지”,『선교와 신학』제 14집 (2004년 6월호)
8. “특집: 중국 산동성 선교사 파송 100 주년”, KMQ 통권 42호 2012년 여름호
9. 방지일 “방효원 선교사와 산동선교” 『선교와 신학』제 19집
10. 함태경, 김교철, “산동성선교 100주년 특집”, 국민일보
<부 록> 한국교회의 산동선교 연대표
1912년 9월 총회설립기념 선교사 파송결의
1913년 11월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산동성 래양에 도착
1915년 박태로 선교사 身病으로 귀국
1916년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임의 귀국
1917년 10월 임시결의, 박태로 재파송, 방효원 파송 박태로 선교사 귀국 ,
김병규 선교사 파송, 홍승한 목사 파송
1918년 11월 박병순 선교사 파송
1919년 의사 김은식 선교사 자비량으로 래양에 도착 계림의원 개원
1920년 래양에 교회 건축
1921년 이대영 선교사 파송, 성경학교 개원, 중국공산당 조직
1922년 산동선교구 분할 래양지구-즉묵지역
1923년 의사 주현즉 선교사(장로) 즉묵에 병원개원
1924년 홍승한 선교사 귀국
1925년 선교지 3구역으로 편성- 북구: 래양 동부와 동북부 동구: 즉묵동부 서구:래양 서남부와 평원지구
1931년 만보만 사건 발생, 김순호 선교사 파송
1932년 상해사변 발생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방지일 선교사 파송
1938년 중일전쟁
1939년 김순호 선교사 귀국
1940년 박상순선교사 귀국
1945년 일본 패망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
1955년 이대영 선교사 귀국
1957년 방지일 선교사 추방
각주)—————–
김영훈 목사는 일시 귀국하여 총회 석상에서 예배 처소 확보, 중국 교회로의 미염, 선겨사 가옥 건축, 자녀 교육, 의료진의 필요를 보고한 바 있으나 총회는 이 문제들을 처리하지 않고 미루었다. [예장총회 제 4 회록] (1917) _백종성에서__ 재인용
김아모스 (편집위원, 빌리온선교회 한국본부대표)